청양문(靑陽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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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곁문.

개설

청양문(靑陽門)은 창경궁의 동쪽 끝 지점에 놓여있고, 대내의 영역과 후원의 영역을 가르는 담장에 설치된 곁문이다. 1475년(성종 6)에 성종이 궁궐의 문들 가운데 액호가 없는 문을 찾아 서거정에게 명하여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이때 창덕궁의 동장문을 청양문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창경궁 청양문과 창덕궁의 청양문이 같은 위치의 동일한 문인지는 알 수 없다. 창경궁의 청양문은 1485년에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21년 뒤인 1496년(연산군 2)의 기사에 영강문에서 청양문까지 장랑을 지으라는 명을 내리는 것이 보이는데(『연산군일기』 2년 7월 2일). 이때의 영강문과 청양문은 「동궐도」 상에 보이는 영강문, 청양문과 주변의 상황이나 위치가 조금씩 다르지만 동일한 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든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동쪽 궁장에는 북쪽으로부터 월근문(月覲門), 통화문, 홍화문, 선인문이 있다. 월근문의 남쪽 가까운 곳에 후원과 대내를 가르는 담장이 동쪽 궁장에서 약간 꺾여 들어가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데, 꺾인 담장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문이 춘운문(春雲門),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담장의 첫 번째 문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문이 청양문이다. 청양문은 대체로 왕이 춘당대 및 후원으로의 거둥 시에 움직이는 동선 안에 들어 있는 문으로 이 문을 열고 나가면 궁궐의 후원이다.

변천 및 현황

1404년(태종 4) 또는 1485년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져 지금은 없는 문이다.

형태

청양문은 양쪽에 담장을 끼고 설치된 솟을문이다. 문의 구조는 사주문(四柱門)으로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지붕은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인데 용마루의 양끝을 용두로 장식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임하필기』에 청양문에 관한 일화가 있다. 1811년(순조 11)에 마침 대제학의 자리가 비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인물 발탁에 나섰다. 이를 ‘문형권점’이라 하는데 왕이 윤정현을 거론하며 그의 됨됨이를 물었다. 삼정승이 모두 나서서 윤정현은 훌륭한 인물이라며 반드시 대제학에 발탁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강력하게 추천을 했다. 그에 더해 아버지인 윤행임 또한 됨됨이가 뛰어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행임은 정조 연간에 승지로 왕을 모셨던 사람이었는데,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함이 지나쳐 책을 한 번 보면 다 외워버릴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했던 그가 정조의 거둥을 따라 춘당대에 나갔을 때, 왕의 뒤에서 모든 전교를 받들어 썼는데 청양문에서 수레에 올라탄 이후부터 대내로 들어와 내릴 때까지 그 많은 전교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 받아 썼다는 일화를 전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