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문(集賢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창경궁 진수당의 정문.

개설

동궐은 크게 창덕궁과 창경궁, 동궁으로 영역이 나뉜다. 동궁은 세자가 거하는 처소이다. 엄밀하게는 창덕궁의 건양문 밖은 창경궁의 영역이므로 동궁은 창경궁에 속하는 공간이었다. 지금의 창덕궁 낙선재, 수강재가 있는 장소는 원래 세자의 정당이자 강학을 하던 낙선당, 수강재와 같은 전각이 있던 곳이다. 그 곁에 있는 진수당 역시 세자궁에 속한 전각이었고, 왕과 세자가 신하를 인견하는 장소로 쓰였다(『정조실록』 20년 5월 25일). 집현문(集賢門)은 진수당의 정문이다.

위치 및 용도

집현문은 진수당의 정문으로 전각의 동쪽 담장에 있었다. 집현문의 남쪽에 연접하여 집영문이 나란히 설치되었는데, 집영문은 시민당의 동쪽 문이었고 남쪽에는 광례문이 있었다. 또한 진수당과 집현문의 사이의 마당에는 서책을 보관하던 장경각이 배치되었고, 집현문 밖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시위하는 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 즉 춘방과 계방 등이 자리하였다. 왕이 환경전에 입시할 때는 빈양문과 함께 합문이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집현문은 진수당과 함께 성종대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에 따르면 헌종대에는 진수당이 별군직 관청으로 전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집현문 또한 그에 상응한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동궐도형」을 살펴보면 헌종대에 조성된 낙선재 영역의 건립으로 「동궐도」와 비교했을 때 주변 상황이 많이 변해있지만, 1900년대 초까지 집현문을 비롯한 진수당·장경각·집영문은 물론이고 춘방·계방 등도 잘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고 지금은 복원되지 않아 빈터에는 무성한 수목이 조성되어 진수당과 그 정문인 집현문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형태

집현문은 진수당을 두르는 동쪽의 담장에 솟을문으로 조성되었다. 「동궐도」에서는 소나무에 가려 형태가 어렴풋한데, 사주문(四柱門)이 2칸으로 구성되었고,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맞배지붕을 얹은 것으로 추측된다. 남쪽으로 다시 짧은 담장에 연접하여 집영문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동궐도형」에는 각각 1칸 규모의 문으로 표현되어 정확한 형태를 기술하기 어렵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45년(인조 23) 4월 26일에 인조를 이어 보위에 오를 소현세자가 느닷없는 죽음을 맞았다. 세자의 죽음은 많은 의혹을 남겼고 슬픔을 더하게 만들었다. 사흘 뒤인 4월 29일에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 의식을 거행했는데 세자의 시강원과 익위사는 문정문 밖에서, 정원과 옥당의 각 관원은 숭화문 밖에 나가 상복을 갈아입었다. 종친과 문무백관은 집현문 밖에서 옷을 갈아입고 곡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성복하는 것도 각각의 직위와 세자와의 관계에 따라 정해진 각각 다른 장소의 문밖에서 행해졌다(『인조실록』 23년 4월 29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