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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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을 이르는 말.

개설

전(磚)은 전(甎)의 속자이다. 전(甎)은 벽돌을 말하며 차음 표기로 ‘벽돌[甓乭]’이라고 표기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한자 의미대로 전이라고 쓴다. 전은 또 전(塼)으로 쓰며 벽(甓)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벽돌은 점토를 주원료로 하여 고온으로 구운 건축 재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벽돌이라고 할 때는 불에 구워 만든 소성 제품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불에 굽지 않고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서민들의 살림집에서 진흙에 짚여물이나 왕겨 등을 섞어서 성형하여 햇빛에 말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흙벽돌이라고 불렀다. 즉 소성한 것을 일반적으로 벽돌이라고 불렀고, 소성하지 않은 것은 같은 흙으로 만든 것임에도 구분하기 위해 흙벽돌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많은 『영건도감의궤』를 볼 때는 전(磚) 자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형이 비슷해 부(磗) 자를 전(磚) 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개 박석(磗石)을 전석(磚石)으로 잘못 읽는 경우가 많다. 전석으로 읽을 경우 벽돌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벽돌을 지칭할 때는 전석(磚石)으로 표기하지 않고 전(甎) 또는 전(塼), 벽(甓)으로 쓰며 뒤에 석(石) 자를 붙이지 않는다. 뒤에 석자가 붙어있으면 대부분은 부석으로 읽어야 한다. 부석은 박석(薄石)을 표기한 것이며 박석은 벽돌과는 거리가 멀다. 박석은 대개 왕릉의 신도나 경복궁 근정전 마당, 종묘 마당 등에 까는 얇게 뜬 판석을 말한다. 여기서는 전(磚)이라고 보고 벽돌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벽돌은 소성 온도, 흙의 종류, 굽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색이 있으며 쓰임과 형태, 크기에 따라 종류를 구분하기도 한다. 대개 바닥에 까는 벽돌을 전이라고 불렀으며 벽을 만드는 벽돌을 벽이라고 구분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에 까는 전은 대개 좌우 폭이 같은 정방형인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 방전(方甎)이라고 한다. 방전으로 오래된 유물은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이 다수 전한다.

벽돌은 양질의 진흙이 있어야 하고 굽기 위해서는 많은 땔감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재료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궐 내전의 담장이나 굴뚝, 지붕의 합각 부분을 치장하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 경복궁 자경전을 중심으로 한 꽃담과 굴뚝, 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만월문 좌우 담장, 덕수궁 유형문 좌우 담장이 유명하다.

꽃담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양처럼 일정한 패턴의 쌓기 법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벽돌을 뉘어 쌓기와 세워 쌓기를 혼합해 무시무종 무늬, 수복강령 등의 문자 무늬, 사선으로 쌓아 만(卍)자 무늬, 육각으로 쌓아 매화 무늬 등을 만들었다. 벽돌은 대개 줄눈 없이 쌓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문양을 연출하기 위해 내민 줄눈으로 치장하였다.

다음으로 벽돌이 많이 사용된 곳이 왕릉의 곡담이다. 일반적으로 미식 쌓기를 하였으며 내민 줄눈으로 치장하였고 일정 간격으로 화강석으로 만든 심을 박아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하였다. 민간에서는 드물게 사용했는데 괴산의 김기응 가옥 샛담에는 궁궐 못지않은 꽃담이 있다. 합각 부분에는 문자 무늬와 얼굴, 만자 및 추상 문양을 새긴 벽돌 벽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쌓기 법은 일반 꽃담과 같다.

치장 벽돌이 아닌 구조 벽돌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사례는 수원 화성(華城)에서 볼 수 있다. 여장과 옹성, 암문, 공심돈 등에 다량의 벽돌을 사용했는데 줄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줄눈이 없는 것은 벽돌을 사다리꼴로 갈아 표면은 줄눈 없이 쌓고 내부에서 회로 채워 접착하는 방법을 썼다. 줄눈이 있는 경우는 전통 방식인 내민 줄눈 방식이다.

연원 및 변천

6세기에 조성된 백제의 무령왕릉은 전축분으로 모든 벽체를 다양한 문양전으로 쌓았다. 전의 색깔은 소성 온도에 따라 검은색, 회색, 붉은색으로 다양하다. 송산리 6호분도 전축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벽돌 중에서 독특한 사례는 백제 유물로 가운데가 빈 중공연화인동문전(中空蓮花忍冬紋塼)이 있다. 손쉽게 벽체를 쌓을 수 있도록 만든 벽돌인데 무게도 줄이고 가운데 공간이 비어있어서 단열 등에도 효과가 있는 과학적인 벽돌이었다. 표면에 새겨진 연화문과 인동문 등은 전체 벽을 쌓았을 때 매우 화려한 치장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

고구려 국내성의 방형 주거지 유적에서는 용문(龍紋), 회문(回紋), 승문(繩紋), 능형문(菱形紋) 등 다양한 무늬의 붉은색 벽돌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벽돌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고 다양했으며 목조 건축만이 아니라 벽돌조 건축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벽돌로 지은 조적(組積) 건축물로 대표적인 유적은 안동 신세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7층 전탑, 송림사 5층 전탑, 조탑동 5층 전탑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벽돌의 사용이 이전보다 활발하지 못했다. 고려의 벽돌 중에서 특이한 것으로는 1966년에 강진에서 출토된 청자전이 있다. 두께도 얇고 크기도 작지만 청자의 은은한 색조와 상감이나 음각으로 조각된 국화, 모란, 구름과 학 장식들은 매우 화려하다. 아마 실내 장식으로 쓰인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대의 문양전들이 건축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의장적 요소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궁궐에서 꽃담이나 굴뚝 등의 장식으로 사용된 사례가 많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사상의 대두로 벽돌이 근대 재료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 사회적인 배경에는 목재의 고갈이라는 상황도 있었지만 규격화에 의한 생산의 효율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벽돌이라는 실학자들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 주장이 실현된 것이 수원의 화성이다.

화성 이전에는 강화부의 강화성 축성에 사용된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강화성과 화성에 사용된 벽돌은 경험의 부족으로 근대 재료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하였다. 예를 들면 줄눈 몰탈 없이 벽돌을 갈아서 맞춰나간 곳이 많은데 이는 벽돌의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많은 벽돌을 갈기 위해서 특별히 마벽패장(磨甓牌將)이라는 감독관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노동 집약적인 수공예적 재료는 근대 재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벽돌의 사용은 규격화를 통한 생산 능률의 향상과 공사 방식의 근대화라고 하는 합리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형태

『화성성역의궤』에서는 방전은 크기에 따라 한 자가 넘으면 대방전(大方甎), 한 자 정도면 소방전(小方甎)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방전을 반으로 가른 것을 반방전(半方甎)이라고 하였다.

벽을 만드는 벽돌은 주로 벽 또는 벽전(甓甎)이라고 불렀는데 그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하였다. 홍예를 만드는 부채꼴 형태의 벽돌은 홍예벽(虹蜺甓), 모서리에 사용되는 삼각형 모양의 벽돌은 귀벽[耳甓], 여장의 지붕 덮개용 벽돌은 종벽(宗甓), 대방전과 크기와 모양은 비슷하지만 여장의 지붕 처마 역할을 하거나 홍예 위에 눈썹처럼 튀어나오도록 한 벽돌은 개벽(蓋甓)이라고 불렀다.

참고문헌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김동욱,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 발언출판사, 1996.
  • 김홍식, 『민족건축론』, 한길사, 1987.
  • 신영훈·조정현, 『한옥의 건축도자와 무늬』, 기문당, 199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