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대장(壯勇大將)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장용대장 |
한글표제 | 장용대장 |
한자표제 | 壯勇大將 |
상위어 | 군영(軍營) |
동의어 | 내영(內營), 외영(外營) |
관련어 | 오군영(五軍營), 장용외영(壯勇外營), 장용내영(壯勇內營), 장용위(壯勇衛), 장용청(壯勇廳), 화성(華城), 현륭원(縣隆園), 화성행궁(華城行宮), 수원(水原), 장용외사(壯勇外使), 원행(園幸), 이현(梨峴)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왕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용대장(壯勇大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
조선후기 정조가 창설한 군대조직인 장용영의 최고 책임자.
내용
장용영은 정조가 왕권 강화와 친위세력의 양성을 위해 설치한 군영이다. 장용영은 도성의 내영과 화성의 외영 2개의 군영을 두었다. 도성의 장용내영은 1788년 창경궁 입구인 중부의 이현(梨峴)에 설치되었고, 장용외영은 1793년(정조 17) 기존의 장용영을 내외영체제로 확대하면서 화성에 설립하였다. 정조는 화성에 현륭원과 행궁을 조성하면서 장용외영을 설치하여 수호군으로 삼았다. 장용외영은 도성의 장용내영에 비해 규모나 병력 면에서 월등하였으며, 오군영의 재원과 병력을 전용하였다. 정조는 장용외영의 설치를 통해 오군영에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의 약화와 함께 분산된 군사 통솔권의 일원화와 군사 재정의 절감을 이루고자 했다. 따라서 장용대장은 정조의 심복임과 동시에 정조의 정책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가 장용외영을 화성에 두면서 기존 오군영의 군병과 물자를 이관시켜서 상대적으로 기존 군영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것에서도 장용대장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화성에 장용외영이 설치되면서 도성에 주재하고 있던 장용영은 내영으로 불렸다. 도성의 장용내영의 대장은 장용내사(壯勇內使)로 불렸으며, 장용외영은 장용외사(壯勇外使)로 불리며 화성유수가 겸직하도록 했다. 또한 장용외사는 화성의 행궁을 담당하는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면서 신도시와 현륭원을 수호하는 것이 고유의 임무였다.
용례
自今水原府使 陞爲留守 兼壯勇外使行宮整理使 惟大臣武將須特旨 又置判官以佐之 壯勇之設營有年 將臣之稱號未定者 以待外使之出也 壯勇營兵房 爲壯勇使 而營中文牒 以大將稱之 如御營使之稱御營大將 置都提擧 備其式 亦如經理營都提擧之三公例兼 而扈衛大將合廳屬之(『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참고문헌
- 『장용청절목초(壯勇廳節目抄)』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김준혁,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노영구, 「정조대 오위체제 복구 시도와 화성 방어체제의 개편」, 『진단학보』93, 2002.
- 이왕무, 「『本營圖形』을 통한 조선후기 장용영의 모습」, 『장서각』21, 2009.
- 최홍규, 「정조대의 화성경영과 장용외영 문제」, 『경기사학』창간호, 199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