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慈慶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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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자경전의 정문.

개설

1776년(정조 즉위) 3월 10일에 영조가 52년의 치세를 마감하고 세손이던 정조가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 정조는 비운에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와 왕비의 반열에서 대비가 되어야 했으나 그저 혜경궁 홍씨의 위계에 머물러야 했던 어머니의 위상을 높이는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은 즉위 초부터 두 사람을 위한 전각의 영건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의 전각과 산 사람의 전각을 횡축의 같은 선상에 놓고 하나는 경모궁, 하나는 자경전이라 불렀다.

자경문(慈慶門)은 창경궁의 후원 영역에 건립한 동조인 대비전, 즉 자경전의 정문이다.

위치 및 용도

자경전은 창경궁의 후원 부용지의 남쪽, 통명전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궁궐의 한가운데서 다른 건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집이 아니라 창경궁의 한적한 장소에 독립적으로 서 있는, 대비의 위상에 걸맞은 전각을 조성하려 한 정조의 노고가 잘 담긴 전각이다. 행각으로 둘러쳐진 마당의 북쪽에 자경전이 있고 행각의 동·서쪽 끝에서 시작된 담장이 자경전 권역의 뒤뜰을 감싸고 둘러쳐졌다. 담장에는 동쪽에 육경문, 북쪽에 적경문, 서쪽에 흥경문이 솟을문으로 설치되었고, 행각의 남쪽에 자경문, 서행각 끝에 보경문이 있다.

자경전의 모든 문에 경사 경(慶) 자를 넣어 모비의 전각을 온전히 축하하고 싶었던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엿보인다. 정조 이후에도 자경전에서는 연향이 자주 베풀어졌는데 자경문은 이러한 의례를 행할 때에 남자와 여자 손님의 자리를 가르는 기준점의 역할을 했다(『순조실록』 27년 9월 10일).

변천 및 현황

자경전은 1777년(정조 1)에 건립되었으나, 1865년(고종 2)에 이건되어 경복궁의 자미당이 되었다. 1915년에 빈터로 남아있던 그 자리에 장서각이라 불리는 일본식 건물을 건립해 왕가의 도서관으로 삼았다. 1981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장서각의 도서가 이관되면서 빈 건물로 남아있다가, 1992년 11월에 창경궁의 장서각도 헐려 나가고 지금은 빈터에 숲이 들어차 있다.

형태

자경문은 행각의 중앙에 있는 정면 1칸 규모의 문으로 행각과 문의 지붕 높이가 나란한 평문이었다. 경사진 지세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단의 기단이 놓였고, 문 앞에는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을 놓았다. 녹색 칠을 한 2짝 판장문이 달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조옥연, 「조선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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