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안부(外案付)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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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외안부 |
한글표제 | 외안부 |
한자표제 | 外案付 |
상위어 | 군역(軍役) |
동의어 | 영안(營案) |
관련어 | 읍안(邑案), 경안(京案), 계사사정(癸巳査定), 갑오사정(甲午査正), 양역실총(良役實摠) |
분야 | 경제/재정/역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손병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외안부(外案付) |
지방에 소재하는 감영·병영·수영·통영 등의 각종 지방군영에 소속된 군역자 총계를 기록한 문서.
개설
지방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수영(水營)·통영(統營) 등에서 도망·사망·노제(老除)로 결원이 된 자들을 대신하여 새로이 입적하는 자들을 기록한 군적과 그 역종별 통계를 기록한 군안을 통틀어 영안(營案), 혹은 외안(外案)이라 하였다. 외안이라는 말은 중앙 군문 및 각사(各司)의 군안인 경안(京案)에 대비한 말이었다. 이에 대해 지방군현 차원에서 군역자의 소속에 따라 작성한 군적·군안을 읍안(邑案)이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군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개선책은 조선전기 법전에 기재된 국가기관 소속 군역자의 수를 기준으로, 그 이외의 군액을 삭감하거나 제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정액 내의 군역자에 대해서는 양정(良丁) 1명에게 하나의 역[一人一役]을 부과하여, 군역을 수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효를 파악하려 하였다.
17세기 말부터 중앙의 각 관서와 군문에 속한 군역자부터 역종별 정액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는 도망·사망·노제로 빠지는 군역자와 군역을 겸하는 자를 없애고, 실제로 역을 부담할 수 있는 건실한 양정(良丁)으로 대정(代定)하는 작업이었다. 설립 초에 정해진 정원 수를 재확인하는 원칙에 따라 소속별·역종별로 군액을 고정시키고 정원 외로 사사로이 모집한 인원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도의 각 영진에 소속된 군역자의 정액화 작업은 1713년(숙종 39)과 1714년(숙종 40)의 계사사정(癸巳査定)과 갑오사정(甲午査正)으로부터 시작되어 173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우선 지방의 군영과 각 군현에서 군관을 위시한 양인 군역자에 대해서 정액화가 진행되었다. 지방 단위의 대정이 이루어지면서 소속처 및 역종별로 지역마다의 군액이 확정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740년대에 전국 규모로 양역자의 소속별 역종별 군액을 기록한 『양역실총(良役實摠)』이 작성될 수 있었다.
변천
지방의 감영과 각 군영의 외안부 군액은 『양역실총』이 공표된 이후에도 당분간은 계속해서 정액화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사천(私賤) 신분의 군역자 수를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변화가 없어, 이후의 『읍지』의 군총(軍摠) 항목에 그대로 기재되고, 일부 군보는 18세기 말에 편찬된 『부역실총(賦役實摠)』상에 보가(保價)의 형태로 반영되었다.
한편 군현별로 지방군의 액수를 고정시킴으로써 지방 차원의 군역 운영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후에 수취 체제가 군현별·지역별로 공동납화 되는 하나의 토대가 되었다.
19세기 호적 말미에 기재된 ‘도이상(都已上)’조에는 직역별 통계에 지방 기관 소속의 군역자 총액이 고정적으로 나타났다. 반면 호적의 본문 안에 각 호구를 살펴보면 지방군의 직역명을 기재한 경우는 상당히 적었다. 이러한 양상은 군현 단위의 총액을 고정시킨 외안부의 군역이, 호구상의 직역 기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뜻하였다.
참고문헌
- 『양역실총(良役實摠)』
- 『읍지(邑誌)』
- 『부역실총(賦役實摠)』
- 김우철, 「均役法 시행전후의 私募属 연구」, 『忠北史學』 4집, 1991.
- 손병규, 「18세기 良役政策과 지방의 軍役運營」, 『軍史』 39, 國防軍史硏究所, 1999.
- 손병규, 「호적대장 職役欄의 군역 기재와 ‘都已上’의 통계」, 『대동문화연구』 39, 2001.
- 정연식, 「조선후기 ‘役摠’의 운영과 良役變通」,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