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포지회(軟泡之會)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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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연포지회 |
한글표제 | 연포지회 |
한자표제 | 軟泡之會 |
동의어 | 연포회(軟泡會) |
관련어 | 조포사(造泡寺)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주영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연포지회(軟泡之會)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6년 4월 5일, 『숙종실록』 7년 6월 3일, 『영조실록』 9년 3월 23일 |
선비들이 두부탕을 함께 먹는 모임.
개설
연포(軟泡)는 얇게 썬 두부 꼬치를 기름에 지진 다음 닭국에 넣어 끓인 음식이다. 연포갱(軟泡羹) 혹은 연포탕(軟泡湯)이라고도 한다. 연포를 함께 먹는 모임의 이름을 연포지회(軟泡之會)라고 불렀는데, 연포회(軟泡會)는 연포지회의 다른 이름이다. 연포지회의 주최자는 선비나 절의 승려였다. 대량으로 두부를 만들어서 왕실에 공급하는 절인 조포사(造泡寺)에서 주로 열렸다. 능원(陵園)에서도 조포사로부터 공급받은 두부가 많아서 이 모임이 개최되었다. 조선후기 이후 사치를 일삼거나 무리를 만들려는 선비들이 이 모임을 핑계 삼아 절이나 능원에서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았다.
내용 및 특징
연포의 ‘포(泡)’는 두부를 가리키는 다른 용어이다. 정약용(丁若鏞)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아언지하(雅言指瑕)」에서 “우리나라의 음식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두부인데, 오해하여 사람들이 ‘포(泡)’로 대신 쓴다.”고 했다. 심지어 정약용은 ‘포(泡)’ 자가 너무 속되므로 ‘포(炮)’ 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포회를 개최하려면 두부가 있어야 하는데, 조선시대에 두부는 귀한 음식이었다. 일반 가정에서는 특별한 날에만 만들었지만 조포사의 역할을 맡았던 절에서는 수시로 두부를 만들었다. 또 잦은 제향을 위해 조포사로부터 많은 두부를 공급받는 능원에도 언제나 두부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절이나 능원에서 친구들이 모여서 연포회를 갖는다고 했다.
연포탕 만드는 방법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치선(治膳)」에 상세하게 나온다. 「조연포갱법(造軟泡羹法)」이란 제목의 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포탕은 겨울에 먹어야 좋다. 살찐 암탉으로 국물을 만들어야 맛있다. 암탉고기에 쇠고기 큰 것 한 덩어리를 넣으면 더욱 맛이 좋다. 두부는 반드시 단단하게 눌러서 만든 것이 적당하다. 이렇게 국물을 만들면서 숯불 위에 솥뚜껑을 올려놓고 기름을 많이 붓고 두부를 골고루 지진다. 암탉고기와 쇠고기를 넣고 끓인 국물에 지져 놓은 두부를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다음, 생강·파·참버섯·표고버섯·석이버섯 등을 곱게 채 썰어서 넣는다. 그릇에 고기국물을 조금 담아 곱게 썬 무와 밀가루를 조금 넣고 골고루 갠다. 여기에 달걀 여러 개를 깨뜨려 넣고 빠르게 저어서 국물에 넣는다. 재료들이 골고루 섞이도록 5~6번 끓어오를 때까지 끓인 다음에 떠서 먹는다. 잘 삶긴 암탉고기는 실처럼 가늘게 찧어 발긴다. 또 달걀노른자와 흰자를 나누어서 기름에 지져 납작한 조각으로 부치고 칼로 실처럼 가늘게 채 썬다. 주발에 연포를 붓고 여기에 암탉고기 바른 것과 채 썬 달걀을 올리고 초피가루와 후춧가루를 뿌려서 먹는다.”
정약용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의 「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寺夜鬻菽乳]」라는 시에서 두부를 주사위 모양으로 네모반듯하게 썰어 긴 손가락 길이의 띠에 여러 가지 버섯과 함께 꿰어 닭국에 넣고 끓인다고 했다.
1800년대 초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찬(酒饌)』에서는 「연포(軟泡)」라는 제목으로 연포탕 만드는 방법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두부를 손가락처럼 잘라서 기름에 지져 낸다. 닭을 삶은 물에 된장을 풀어서 졸인다. 삶은 닭고기를 마구 다지고, 석이버섯·표고버섯·파·생강도 함께 다진다. 밀가루 즙을 조금 풀고 재료를 모두 넣고 끓인다. 후춧가루와 천초가루를 뿌린 다음에 상에 낸다.”
조선후기 선비들이 쓴 문집에는 연포지회 혹은 연포회를 묘사한 시가 많이 나온다. 그들의 시에서 연포회가 개최된 장소는 절이었다. 이소한(李昭漢)은 청곡사(靑谷寺), 이인엽(李寅燁)은 영수암(靈水庵), 김하구(金夏九)는 정흥사(淨興寺), 유언술(兪彦述)은 마곡사(麻谷寺)에서 열린 모임에서 연포탕을 먹었다고 했다.
연포지회 혹은 연포회에 대한 조정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업무를 태만하게 한 지방 관원이 산 속의 절에 머물면서 연포지회의 모임을 가졌다는 비판이 왕에게 보고되기도 했다(『명종실록』 6년 4월 5일). 또 여러 도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던 어사(御史) 중에서 찰방(察訪)·적객(謫客)과 어울려 산사(山寺)로 돌아다니며 연포회를 베풀면서 놀았다는 보고도 있었다(『숙종실록』 7년 6월 3일). 심지어 연포지회를 빙자하여 사적인 결사 모임인 계(契)를 조직한 선비도 있었다(『영조실록』 9년 3월 23일).
변천
조선후기부터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준비하거나 벼슬에서 물러나 수양하기 위해 절에 자주 드나들었다. 절에 머무는 선비들이 연포회를 많이 개최했다. 절의 승려들도 선비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연포회를 자주 열었다. 이에 영조는 산사(山寺)에서 열리는 연포회의 폐단이 많다고 보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송호집(松湖集)』「봉일암(鳳逸菴)」『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주찬(酒饌)』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추암집(楸菴集)』
- 『현주집(玄洲集)』
- 『회와시고(晦窩詩稿)』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