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申聞鼓)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신문고 |
한글표제 | 신문고 |
한자표제 | 申聞鼓 |
동의어 | 등문고(登聞鼓), 승문고(升聞鼓) |
관련어 | 상언(上言), 격고(擊鼓), 격쟁(擊錚), 국왕직소제(國王直訴制), 월소조(越訴條) |
분야 | 정치/사법/법제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종~고종 |
집필자 | 정순옥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문고(申聞鼓) |
조선시대 국왕에게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기 위해 두드리는 북. 또는 그 제도
개설
신문고(申聞鼓)는 1401년(태종 1) 7월 등문고(登聞鼓)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신문고로 이름을 고쳤다. 신문고는 최후의 항고(抗告) 시설로,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 주장관(主掌官),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하여 사헌부에 고소하고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 신문고를 두드리게 하였다. 신문고 설치로 국왕직소제(國王直訴制)가 마련되었고 자기원억(自己冤抑)에 한정하여 소원할 수 있는 소원 제도가 확립되었다. 당시 신문고를 설치한 취지는 격고에 의해 모든 억울함과 원망이 왕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관리들에게 알려 이들의 부정한 처분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데 있었다.
신문고는 조선의 통치자인 국왕·관인이 그들을 중심으로 한 통치 체계를 유지하고 동시에 모든 백성들의 뜻을 위에 전할 수 있게 하여 억울함을 해소함으로써 선정을 도모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청원, 상소, 고발 시설로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격한 신문고 운영 규정 및 국가의 통치력과 관련되어 소수 지배층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 및 특징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설치되었으며, 신문고를 통해 올라온 백성들의 상언은 의금부 당직원이 접수하여 사헌부의 퇴장(退狀)을 살펴보고 왕에게 아뢰었다. 신문고에 접수된 상언의 처리는 왕의 계하(啓下)가 있은 지 5일 이내에 해당 관사의 회계(回啓)가 있어야 하며, 만일 기한을 넘기면 바로 회계하지 못한 사연을 갖추어 아뢰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의 억울함이 신속히 처리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문고를 울려 상소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었다. 즉 자기 자신에 관한 일, 부자지간에 관한 일, 적첩(嫡妾)에 관한 일, 양천(良賤)에 관한 일 등 4건사(四件事)에 관계된 경우만 허용되었다. 조선후기 『속대전(續大典)』에서는 4건사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기타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아랫사람이 그의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하거나, 품관(品官)·향리(鄕吏)·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또는 타인을 매수·사주(使嗾)하여 고발하게 하는 자는 벌을 주었으며, 오직 종사(宗社)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누명 및 자기에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하여 해결해 주었다.
15세기 말에 편찬된 『대전속록』에는 "등문고를 쳐서 상언하면 역시 해당 각사에 내려 허실을 분간하도록 할 것이며 율문의 월소조(越訴條)에 따라 시행한다."고 하여 호소 내용을 가려 월소율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또한 자기원억에 대한 소원이 법제적으로 허용되기는 하였지만 이 역시 청송관이 처결을 고의적으로 지연하거나 세력 있는 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잘못 판결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소원 제도 확립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신문고는 청원·상소의 도구로서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관리들에게만 이용되었으며, 원래의 취지와 달리 일반 백성이나 지방의 관민 사이에서는 제 역할을 못하였다. 신문고는 국왕이 직접 백성들의 억울함을 처리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민의 창달이라는 관념적인 뜻에 부합하기보다는 태종 초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특수 신분층에 은총을 내리고 관료의 발호를 억제하는 효능을 본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신문고 기능을 둘러싼 논의도 분분하였다. 신문고 설치 후 우정승 이무(李茂)가 "신문고를 설치한 것은 아름다우나 백성들이 함부로 북을 치는 자가 있습니다."라고 하여 백성들이 송사 처결에 승복하지 않고 걸핏하면 신문고를 두드림으로써 관권을 능멸한다고 신문고 설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하륜(河崙)은 수령→관찰사→사헌부→신문고의 3단계 소원 절차를 엄격히 준수하면 월소의 폐단을 쉽게 막을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특히 신문고의 설치를 계기로 지방관이 송사 처결에서 신중함과 공정성을 기하게 될 것이므로 신문고가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소시켜주고 권익을 신장시켜주는 훌륭한 제도가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신문고 설치를 둘러싼 이무와 하륜의 논쟁은 관권 보호와 백성들의 억울함 해소 중 어느 것을 중시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이후 형태를 달리하면서 계속 제기되었다.
변천
신문고는 1401년(태종 1)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해 7월 안성학장(安城學長)윤조(尹慥)·전 좌랑(佐郞)박전(朴甸) 등의 상서(上書)에 따라 처음으로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에 억울함이 있는 자가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등문고를 신문고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태종~문종대에는 활발히 운영되었으나 그 이후로 격쟁의 이용과 함께 유명무실해졌다. 16세기 들어 상언·격쟁이 활발해지는 점으로 보아 연산군(燕山君)부터 중종대까지 제도만 남아 있었던 듯하다. 1543년(중종 38) 대궐 내에 잠입하여 격쟁을 통해 억울함을 진소하는 사람을 쫓아내자 "등문고가 통민정(通民情) 신원왕(伸寃枉)의 일단이 되기는 하나 지금은 운영되지 않기에 민인들의 억울함을 진소할 길이 없어 격쟁한다."고 기록한 사관의 논평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초 신문고의 기능이 조선중기 유명무실해지면서 백성들은 상언과 격쟁을 새로운 소원 수단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신문고 제도는 조선후기에 부활하였으나 1704년(숙종 30) 4건사(四件事) 이외에는 신문고 사용을 전면 금지하였다. 1771년(영조 47) 11월 신문고가 다시 설치되었는데, 당시 지나치게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언·격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 중 하나였다. 영조는 "국초의 고례(古例)에 따라 창덕궁 진선문과 현재 어소인 건명문 남방에 신문고를 복설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내리고 백성들의 모든 억울함은 이를 통해 호소하도록 명하였다. 신문고 복설 이후 "만약 이전처럼 차비문(差備門)에서 궐내격쟁(闕內擊錚)을 하거나 가도(街道)에서 위외격쟁(衛外擊錚)을 할 경우 사건사가 아닌 경우는 호연충군(湖沿充軍)하며, 사건사라 할지라도 장일백(杖一百)에 처하도록 한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영조는 신문고 복설을 통해 격쟁의 남발을 금제하는 한편 비사건사를 소원하는 외람화 풍조도 아울러 차단하고자 하였다.
1772년에는 법이 허용한 4건사라 할지라도 수령의 비리는 신문하지 못하며, 비 4건사로 신문고를 두드릴 경우 격쟁인과 마찬가지로 해도충군(海島充軍)으로 다스리는 등 법규를 어긴 격고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럼에도 신문고를 남잡(濫雜)하게 두드리는 폐단을 일으킨다는 보고가 잇따르자 국왕은 신문고를 외람되이 두드리는 것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1782년(정조 6)에는 대신들이 신문고를 대궐 밖으로 옮겨 설치하여 격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대신 위외격쟁은 금지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정조는 위외격쟁을 금지하는 것은 소원의 길을 막을 수 있다며 난색을 표명하였다. 다음해에도 이 문제는 다시 제기되었으나 정조는 "신문고를 대궐 밖으로 설치한 후 관장하는 일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격쟁은 이전부터 전래한 고유한 법으로 신문고 이설과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위외격쟁(衛外擊錚)을 금지할 수 없다."고 하여, 신문고 이설을 통해 상언과 격쟁을 통제하려는 신하들의 시도가 좌절되었다.
신문고 제도는 1401년(태종 1)부터 1883년(고종 20)까지 부침을 거듭하며 군주의 통치 방식과 시대 상황에 따라 그 활용이나 효용도가 다르게 나타났다.
의의
이 제도는 원래의 취지와 달리 백성이나 노비 또는 지방의 관민 사이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대소 신료들의 징계에 이용됨으로써 신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신문고를 두드려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던 신문고의 설치는 덕치와 민본이 결합한 백성을 위한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산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신문고는 형사법의 절차적 정의와 실체적 정의를 구현하고 국가와 사회 및 개인으로부터 침해를 받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여 민생의 안정과 개인의 권리 구제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였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韓相權, 『朝鮮後期 社會와 訴冤制度-上言·擊錚연구』, 일조각, 1996.
- 최이돈,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관행의 형성과정」, 『한국사연구』82, 한국사연구회, 1993.
- 김영주, 「신문고 제도에 대한 몇 가지 쟁점-기원과 운영, 기능·제도의 변천을 중심으로」, 『한국언론정보학보』통권39호, 한국언론정보학회,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