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면색(米糆色)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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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미면색 |
한글표제 | 미면색 |
한자표제 | 米糆色 |
상위어 | 내자시(內資寺), 영접도감(迎接都監), 예빈시(禮賓寺) |
동의어 | 미면색(米麪色) |
관련어 | 미면색(米麪色) 낭청(郎廳)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주영하 |
폐지 시기 | 1894년(고종 31)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미면색(米糆色)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40년 4월 18일, 『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9월 21일 |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대접하는 데 필요한 곡물·차·술·횃불·초·땔나무·숯·향약·그릇 등의 공급을 담당한 관원.
개설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기구인 영접도감(迎接都監)에 소속되어 사신의 아침저녁 식사에 필요한 곡물·차·술 등과 방에 설치해야 하는 초·향약·그릇·땔나무, 이동할 때 필요한 횃불 등의 공급을 담당한 관원이다. 미면색(米糆色)이란 명칭은 아침저녁 식사에 필요한 곡물을 으뜸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미면색의 책임자는 미면색(米麪色) 낭청(郎廳)이라고 불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의 예빈성(禮賓省)·객성(客省)·전객시(典客寺)에서 유래한 예빈시(禮賓寺)는 1392년(태조 1)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이 기구에 미면색 관원이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조선초기부터 명나라 사신이 오면 영접도감을 임시로 설치하여 미면색의 직장(職掌)을 다른 관서로부터 차출해 두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직 및 역할
미면색 낭청은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 임시로 구성한 영접도감에 다른 관서의 관원을 차출하여 겸직시킨 당하관(堂下官)의 실무 관직이다. 미면색 낭청의 추천은 영접도감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겸직이었기 때문에 왕실의 다른 관서에서 차출되었다. 주로 관서의 좌랑(佐郞)이나 사평(司評) 등이 맡았다. 영조대의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미면색 낭청은 사신이 행차할 때 융복을 입고 수행하였고, 사신의 연회 때 차를 올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사신이 감주(甘酒)를 먹고 싶다고 하면 미면색에게 구해 오게 했다. 미면색 낭청의 주된 업무는 물품의 회계 업무였기 때문에 임명된 후에 부담을 가진 관원들이 개인적인 사정을 들어 직책에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609년(광해군 1) 4월 선조(宣祖)의 상례(喪禮) 때 온 명나라의 사제천사(賜祭天使)와 6월 광해군의 책봉천사(冊封天使) 영접 때의 상황을 적은 『영접도감미면색의궤(迎接都監米糆色儀軌)』에서 미면색은 쌀과 밀가루[米麵], 차와 술[茶酒], 약을 제조할 때 역겨운 냄새를 없애기 위해 첨가하거나 몸에 지님으로써 나쁜 냄새를 없애는 데 사용되었던 향약(香藥), 횃불과 촛불[炬燭], 땔나무와 숯[柴炭], 그리고 사신의 방에 놓는 그릇[房排器皿] 등을 관장했다.
1634년(인조 12) 6월에 세자 봉책(冊封)을 위해 온 명나라의 사신 영접에 관한 영접도감의 『영접도감미면색의궤』에서는 이들 물품들을 왕실의 여러 관서에서 수령한 내용이 나온다. 곡물은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사도시(司䆃寺)·군자감(軍資監)·동적전(東籍田)·서적전(西籍田)·예빈시·봉상시(奉常寺)·평시서(平市署)·풍저창(豊儲倉)·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로부터 공급받았다. 조미료는 내자시·내섬시·의영고(義盈庫)·예빈시·사재감(司宰監)·사포서(司圃署)로부터 공급받았다. 또 장원서(掌苑署)에서 과실(果實), 의영고·제용감(濟用監)에서 차, 내자시·내섬시·내의원(內醫院)에서 술, 태평관(太平館)·사옹원(司饔院)·공조(工曹)·상의원(尙衣院)·별공작(別工作)·평시서·응판색(應辦色)·분공조(分工曹)·내의원·군자감·제용감·광흥창(廣興倉)·선공감(繕工監)·사재감·의영고·장흥고(長興庫)에서 그릇을 제공받았다. 향약은 전의원(典醫院)·사복시·응판색으로부터 공급받았다. 미면색은 각 관서로부터 공급받은 물품을 사신의 처소에 제공해 주는 일을 했다. 미면색은 사신의 영접뿐만 아니라, 궁궐의 건축과 같은 왕실의 대규모 인력 동원이 있을 때 곡물을 비롯하여 땔나무와 숯, 그리고 의약품의 공급도 맡았다. 1808년(순조 8)에 쓰인 『만기요람(萬機要覽)』의 「연접도감분장(延接都監分掌)」에서는 미면색이 ‘밥쌀[飯米]·땔나무[柴]·숯[炭]·의약(醫藥)’을 맡는다고 했다. 고종 때 미면색의 주된 업무는 쌀·찹쌀·녹두·참깨·메밀·팥 등의 곡물을 확보하여 관리하는 일이었다.
변천
주로 사신의 연회 음식과 식사 음식의 곡물을 담당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궁궐의 복구를 담당했던 임시기구인 궁궐영조도감(宮闕營造都監)에 소속된 미면색은 일꾼들의 식사에 필요한 곡물을 제공하는 일도 했다(『선조실록』 40년 4월 18일). 이때의 미면색은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내자시에 소속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9월 21일). 인조대 이후의 미면색은 영접도감이 설치되면 곡물 등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미면색의 책임자인 미면색 낭청은 관리 물품의 수급과 관련된 전체 출납 업무를 책임졌다. 고종 때 미면색은 예빈시에 소속되어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곡물의 회계 업무를 맡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영접도감미면색의궤(迎接都監米糆色儀軌)』(1609)『영접도감미면색의궤(迎接都監米糆色儀軌)』(1634)
- 김상보·이성우, 「조선왕조의 영접도감미면색의궤에 관한 분석적 연구 : 1609년 1610년의 의궤를 중심으로」, 『韓國食生活文化學會誌』제6권 제4호,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