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東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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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거처하는 궁궐의 영역 및 전각.

개설

동궁은 세자라는 인물을 지칭하기도 하고, 세자가 거처하는 궁궐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동궁에는 공식적인 의례를 행하는 정당(正堂)과 독서 강론을 위한 서연처(書筵處), 휴식과 거처를 위한 내당(內堂)이 있었다.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춘방(春坊)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계방(桂坊)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도 있었다. 부속 공간으로는 책고(冊庫)와 각종 시중을 위한 장방(長房), 수라간, 등촉방 등의 시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궁은 경복궁과 창덕궁, 경덕궁[경희궁] 내에 일정 영역을 차지하고 조성되었으나, 본 궁궐과는 별도의 궁궐로 인식하였다. 궁궐에 문제가 생기거나 병이 있거나 하면 대비와 왕비 등이 동궁으로 이어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동궁은 세자를 상징하여 춘궁(春宮), 청궁(靑宮)이라고도 하며 궁궐의 동쪽에 자리 잡는다. 영역의 내부 구성은 정치적인 행위보다 효를 실천하고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 주를 이루었다. 효의 실천은 아침·저녁 문안을 올리고 왕의 수라상을 살피는 시선(視膳)과 왕실의 웃어른의 약을 살치는 시탕(侍湯)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부분 세자가 왕과 왕비, 대비가 머무는 공간을 찾아가 이루어지므로 이런 효의 실천을 위한 공간을 동궁에 특별히 마련하지는 않는다.

세자의 교육은 경서(經書)를 읽고 익히는 방식으로 정기적인 법강(法講)회강(會講)이 있었다. 회강은 사부를 비롯하여 시강원의 관원이 참석하는 가운데 회강례를 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이므로 이에 맞는 건축 공간이 필요하였다. 회강을 위한 장소는 동궁의 정당으로 창덕궁의 시민당과 중희당(重熙堂), 경희궁의 경현당(景賢堂) 등을 들 수 있다. 법강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 강의의 형식이기 때문에 회강의 공간보다 격식이 낮고 편안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회강이 이루어진 곳은 경복궁의 비현각(丕顯閣)과 승화당(承華堂)이며, 창경궁의 성정각(誠正閣)과 진수당(進修堂), 덕성합(德成閤) 등이다.

동궁의 중심 건물이며 세자가 거처하는 공간으로는 경복궁의 자선당(資善堂)과 창덕궁의 저승전(儲承殿), 경희궁의 승휘전(承輝殿)과 집희당(緝熙堂)·경선당(慶善堂) 등이 있다. 세자가 일시적으로 대리청정을 할 경우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행할 정전과 같은 건물이 필요하였다. 세종 연간에는 세자의 대리청정 동안 조하를 받을 수 있도록 계조당(繼照堂)이라는 정당을 조성하여 사용하였으며(『세종실록』 25년 5월 12일), 승화당에서 주로 정사를 논의하였다(『세종실록』 24년 9월 16일). 세자가 문무백관에게 조하를 받을 경우 왕과 구분하여 격을 낮추어 의례를 행하도록 세종 연간에 의주(儀註)를 정리하였다. 이에 따르면, 왕세자가 조하를 받을 때에는 건물의 동쪽에 앉아 서향하며, 문무백관은 당(堂)의 뜰 북쪽과 남쪽에 나누어 서고 동향하여 의례를 행한다. 이와 같은 의례의 특징에 따라 조선초에 건립된 동궁의 정당인 계조당과 시민당(時敏堂)은 동향 혹은 서향으로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동궁이 조성된 궁궐은 경복궁과 창덕궁·경덕궁[경희궁]이다. 각 궁궐마다 조성 시기가 다르며, 각 궁궐마다 동궁을 상징하던 대표 전각이 있다. 시기에 따라 사용된 전각에도 차이가 있어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동궁이 궁궐 밖 동쪽에 조성되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창덕궁 동편의 연화방(蓮花坊)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동궁을 궁궐 안에 건축할 것에 대한 논의는 1412년(태종 12)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이었던 이내(李來)의 상소에서 시작된다(『태종실록』 12년 12월 5일). 당시 세자에 대해 논의된 내용에 의하면, 세자의 주된 직무는 삼조지례(三朝之禮) 즉, 왕과 왕비, 대비 등 왕실의 웃어른을 하루에 세 번 찾아뵈어 안부를 묻고 식사를 살피는 일이었다. 이는 효의 기본적인 실천이었다. 그러나 궁궐 밖에 동궁이 있다 보니 매일 의장과 호위를 갖추고 하루에 세 번씩 행차하기 어려워 빠뜨리는 때가 생겼다. 이로써 세자의 도리를 행하지 못하게 되니 궁궐 내에 동궁을 조성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처음 궁궐 내에 동궁이 마련된 것은 1427년(세종 9) 경복궁에 자선당을 건립한 것이다. 경복궁에서는 자선당과 비현각, 승화당, 계조당이 동궁의 전각으로 사용되었다. 계조당은 1443년(세종 25)에 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 공간으로 문무백관에게 조회를 받기 위해 지어졌다. 문종은 세자 시절 경복궁의 동궁에서 생활했고 대리청정 시에는 계조당에서 조하와 조참을 행하였으며 승화당에서 정사를 보았다.

1453년(단종 즉위) 문종의 뜻에 따라 계조당과 승화당을 철거하기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계조당만 철거되었다(『단종실록』 즉위년 6월 2일). 이후 1543년(중종 38) 동궁에 화재가 일어나 왕이 머무는 곳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승화당을 철거하였다(『중종실록』 38년 1월 7일). 소실된 동궁은 명종 연간에 중건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과 함께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창덕궁에 동궁이 조성된 것은 1485년(성종 16)의 일이다. 동궁을 조성할 때 성종은 직접 건양문 밖에 나아가 동궁의 터를 살펴보았다. 동궁을 조성하기 시작할 때에는 세자궁영선소(世子宮營繕所)라는 공사 담당 임시 기관을 조성하였다. 이 기관은 공사의 규모가 크고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춘궁조성도감(春宮造成都監)으로 승격하였다(『성종실록』 16년 2월 11일). 건양문 밖은 실상 창덕궁의 궁역 밖으로 볼 수 있으며, 이때의 동궁은 창덕궁의 동쪽이자 창경궁의 남쪽에 맞대하여 조성되었다.

조성초기 중심 전각은 저승전이었다. 시민당은 왕세자가 관례나 회강, 대리청정 시 조회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낙선당은 왕세자의 정당이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 시민당 문 밖에는 춘방과 계방이 위치하고 있다. 영조의 아들이었던 장조(莊祖) 즉,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이곳에서 오랜 기간 대리청정하기도 하였다.

낙선당은 1756년(영조 32)에 소실되었으며, 저승전은 1764년(영조 40)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모두 재건되지 않았다. 시민당은 1780년(정조 4) 7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바로 재건하려 하였으나 8월에 중건을 취소하여 이후 터만 남게 되었다. 결국 성종 연간에 조성한 창덕궁의 동궁 전각은 영조와 정조 연간에 모두 소실되었다.

1782년(정조 6)에는 기존의 동궁 영역을 그대로 두고 그보다 북쪽으로 창덕궁 영역에 중희당을 건립하였다. 중희당은 왕이 강연과 소대를 자주 하던 편전인 희정당(熙政堂) 가까운 곳에 남향으로 위치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도 매우 컸다.

‘동궐도(東闕圖)’에서 묘사된 중희당의 모습은 높은 기단 위에 정면 7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마당에는 측우기,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 등 왕세자의 학문과 관련한 기구를 두고 있다. 중희당 동쪽으로는 2층의 소주합루(小宙合樓)가 있으며, 중희당에서 소주합루로 올라가는 길에는 보루(步樓), 삼삼와(三三窩), 육우정(六隅亭) 등이 조성되어 있다. 또 중희당은 ‘ㄷ’자형으로 북쪽에 유덕당(維德堂)이 있으며, 중희당과 유덕당을 잇는 서행각에는 석유실(錫類室)이 있다. 이것은 1827년(순조 27)에 증축된 것이다. 순조 연간에 효명세자(孝明世子)는 창덕궁의 동궁에서 주로 생활하였으며 대리청정 시 중희당을 정당으로 하고, 수강재(壽康齋)를 별당으로 사용하였다.

경희궁은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개인 저택이 있던 새문동에 지어졌다. 1612년(광해 4)에 건축을 시작하여 1620년(광해 12)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동궁의 위치는 편전으로 쓰이는 흥정당(興政堂)의 동쪽과 자전의 거처인 장락전(長樂殿)의 남쪽에 꽤 넓게 자리 잡았다. 경희궁 동궁은 182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서궐도안(西闕圖案)’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경희궁의 동궁은 정침인 승휘전 이외에 경현당, 양덕당(養德堂), 집희당, 경선당 등이 있다. 광해군 연간에 조성된 동궁의 정침은 승휘전이었으나 1698년(숙종 24)에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고 집희당과 경선당을 정침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집희당은 영조가 세자 시절을 보낸 내당(內堂)이며, 경선당은 정조가 세손 시절을 보낸 곳이다. 경현당은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당이다. 이곳에서 경희궁 동궁의 첫 주인이 되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회강례를 치루기도 하였다. 영조는 「경현당명병소서(景賢堂銘幷小序)」에 ‘창덕궁은 시민당이 있고 경덕궁은 경현당이 있는데 모두 세자가 경서를 강독하고 하례를 받는 정실(正室)이다.’ 하고 기록하였다. 양덕당은 『궁궐지(宮闕志)』「양덕당시(養德堂詩)」에서 서당(書堂)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경현당의 북쪽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경현당의 공식적인 의례와 관계하여 사용되었다.

현재 동궁의 건물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여러 궁궐이 훼손되면서 동궁도 사라졌다. 2000년 경복궁에 자선당과 비현각이 복원되었으나 이는 고종 연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을 ‘북궐도형(北闕圖形)’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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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김동욱, 「조선 정조조의 창덕궁 건물구성의 변화」, 『대한건축학회논문집』97, 1996.
  • 신지혜, 「17~18세기 경희궁 동궁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이효석, 「조선시대 세자의 궁궐 공간 사용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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