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오부(都城五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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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도인 한성부의 행정조직.

개설

1396년(태조 5) 수도 한성부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리적 방향에 따라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한성부를 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중부(中部)의 5개 부로 나누고 그 아래 52개의 방(坊)을 두어 다스렸다. 5부 조직은 고종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5서(署)로 바뀌었고, 그 하부 조직은 시대에 따라 증감이 이루어졌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의 태조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과거 고려시대 개성부의 직제를 그대로 따서 한양부를 만들었다. 1395년(태조 4) 4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고, 그 이듬해에는 한성부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구역을 나누어 5부의 행정조직을 두었다(『태조실록』 5년 4월 19일). 이때 만들어진 5부는 지역에 따라 구분하여 크게 중부·동부·서부·남부·북부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하부 조직으로 방을 따로 두어 행정의 효율을 꾀하였다. 당시 설치된 하부 조직으로는 동부에 연희방(燕禧坊)·숭교방(崇敎坊)·천달방(泉達坊)·창선방(彰善坊)·건덕방(建德坊)·덕성방(德聖坊)·서운방(瑞雲坊)·연화방(蓮花坊)·숭신방(崇信坊)·인창방(仁昌坊)·관덕방(觀德坊)·흥성방(興盛坊) 등 12방, 서부에 영견방(永堅坊)·인달방(仁達坊)·적선방(積善坊)·여경방(餘慶坊)·인지방(仁智坊)·황화방(皇華坊)·취현방(聚賢坊)·양생방(養生坊)·신화방(神化坊)·반석방(盤石坊)·반송방(盤松坊) 등 11방이 있었다. 남부는 광통방(廣通坊)·호현방(好賢坊)·명례방(明禮坊)·태평방(太平坊)·훈도방(熏陶坊)·성명방(誠明坊)·낙선방(樂善坊)·정심방(貞心坊)·명철방(明哲坊)·성신방(誠身坊)·예성방(禮成坊) 등 11방을 두었고, 북부는 광화방(廣化坊)·양덕방(陽德坊)·가회방(嘉會坊)·안국방(安國坊)·관광방(觀光坊)·진정방(鎭定坊)·순화방(順化坊)·명통방(明通坊)·준수방(俊秀坊)·의통방(義通坊) 등 10방을 두었다. 이어 중부는 정선방(貞善坊)·경행방(慶幸坊)·관인방(寬仁坊)·수진방(壽進坊)·징청방(澄淸坊)·장통방(長通坊)·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 등 8방을 설치하여 모두 52개의 방으로 나누어서 관할하였다.

조직 및 역할

한성부 산하 행정단위인 5부에는 관원이 파견되었다. 태조는 1392년에 조선의 관제를 공포할 때 “동부는 한성부의 호적(戶籍)을 담당하는 일을 관장하는데, 종6품의 영(令) 1명, 임시직 녹사(錄事) 2명이 담당한다. 남부·서부·북부·중부는 모두 동부의 예에 따른다.” 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즉 5부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으로 각 부마다 령을 1명씩 두고, 그 아래에 녹사 각 2명을 두었다. 이후 태종은 5부 책임자의 직급이 너무 낮아 업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자 한성부 낭청(郎廳)과 동일한 지위로 격상해주었다. 세종 때는 5부의 업무가 너무 많아 잡다한 일을 수행하는 사령을 각각 10명씩 배정해주기도 하였으며(『세종실록』 7년 2월 25일), 5부의 장에게 대장(隊長)·대부(隊副)·체아직(遞兒職) 다섯 자리를 주고, 한성부에서 그들의 근무 실적을 살펴서 임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0년 윤4월 8일). 이어 한성부 도성 안뿐만 아니라 도성 밖 10리 이내 지역의 업무도 아울러 집행하도록 하였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오부가 종6품 아문(衙門)으로 분류되어 책임자로 주부(主簿)를 임명하였고, 그 아래에는 참봉(參奉) 2명을 두어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5부의 관제를 개정하였다. 주부를 도사(都事)로, 참봉을 봉사(奉事)로 개칭하였다. 그 이유는 5부의 책임자인 주부가 사법권이 없어 죄인의 잘잘못을 가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사법권을 가진 강력한 책임자를 임명함으로써 5부의 권한을 강화한 것이다(『영조실록』 18년 10월 14일).

이후 1791년(정조 15)에 다시 관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한성판윤으로 있던 구익(具㢞)은 “5부의 관직은 곧 사대부의 음관 자리입니다. 그런데 직무는 가장 많은데 비해 관직의 모양새는 형편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가 기피하는 데다 아래 관리들도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을 하지 않아 위엄과 명령으로 통솔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만약 성상께서 봉사는 참하관(參下官)의 도사로 고쳐서 30개월이면 승진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고, 도사는 낙양령(洛陽令)의 뜻을 따라 6품에 오른 달 수가 찬 자에게는 송사에 관한 직무를 겸임시켜 5품으로 올려주되 이름을 령으로 고친다면 관직 명칭도 깨끗해짐과 동시에 근거도 갖추게 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장차 관리를 골라서 임명하고 또 임명되기를 바라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정조의 재가를 받았다. 이에 주부를 종5품직인 령으로 올렸고, 종8품인 봉사를 종7품직인 도사로 고쳤다. 그리고 그 아래 이속(吏屬)으로 서원(書員) 4명, 사령(使令) 8명, 대청직(大廳直) 1명, 군사 2명을 두어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5년 4월 4일).

조선전기 5부의 업무는 한성부 업무 가운데 송사 업무를 제외한 모든 일을 담당하여 각 지역의 호구 조사는 물론 민생 치안과 구휼 등 한성부민의 생활과 직결된 일을 수행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기존 업무에 간단한 송사 업무까지 관장하면서 그 기능이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변천

조선초기 태조 때 만들어진 도성 5부는 1895년 지방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다만 그 하부 조직인 52방은 시대에 따라 축소 또는 확대되었다. 세종 때는 서부의 영견방·인지방·취현방의 3개 방이 폐지되어 49개 방으로 축소되었다. 이어 1751년(영조 27)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는 동부 12개 방에서 연희방·천달방·덕성방·서운방·관덕방·흥성방 등 6방이, 남부에는 성신방·정심방·예성방 등 3방이 폐지되고 새로 한강방(漢江坊)·둔지방(屯之坊)·두모방(豆毛坊) 등 3방이 신설되었다. 서부에는 신화방을 폐지하고 용산방(龍山坊)·서강방(西江坊)이 새로 신설되어 8개 방에서 9개 방이 되었다. 북부에는 명통방을 폐지하여 9개 방에서 8개 방이 되었다. 따라서 영조 때 한성부 5부의 방은 동부 6개 방, 남부 11개 방, 서부 9개 방, 북부 9개 방, 중부 8개 방 등 모두 43개 방으로 축소되었다.

1788년(정조 12) 정조는 한성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부에 경모궁방을 신설하고 북부에 상평방(常平坊)·연은방(延恩坊)·연희방(延禧坊)을 신설하여 모두 4개 방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들 방 밑에 계(契)를 설치하였다. 당시 신설된 북부 상평방에는 선혜청계(宣惠廳契)·경리청계(經理廳契)·조지서계(造紙署契)·훈창계(訓倉契)·금창계(禁倉契)·어창계(御倉契)를 두었고, 영은방에는 홍제원계(弘濟院契)·양철리계(梁哲里契)·역계(驛契)·사계(私契)·불광리계(佛光里契)·갈현계(葛峴契)·신사동계(新寺洞契)·말흘산계(末屹山契)를 두었으며, 연희방에는 아현계(阿峴契)·세교리(細橋里) 1계(契)·세교리 2계·연희궁계(延禧宮契)·가좌동(嘉佐洞) 1계(契)·가좌동 2계·성산리계(城山里契)·증산리계(甑山里契)·수색리계(水色里契)·휴암리계(鵂巖里契)·구리계(舊里契)·망원정(望遠亭) 1계(契)·망원정 2계·망원정 3계·합정리계(合亭里契)·여화도계(汝火島契)를 각각 두었다(『정조실록』 12년 10월 16일). 이때 확장된 행정구역은 모두 도성 밖 과거 성저십리 지역이다. 과거에는 도성 안 5부에서 관할하던 지역이었으나 18세기 이후 이 지역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행정조직의 필요성이 요구됨에 따라 새로 방을 신설하였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할 때 한성부 5부를 5서로 개칭하였고, 계를 288개로 줄이고 775개의 동(洞)을 설치하여 한성부는 5서 288계 775동의 행정조직을 갖추었다.

참고문헌

  •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 도시사』, 태학사, 2007.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행정사』, 1997.
  • 원영환, 『조선시대 한성부연구』, 강원대출판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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