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번수포(停番收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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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돌아가며 서울에 올라와 근무하는 번상을 정지시키고 그 대신 포를 거두는 것.

개설

조선시대에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 때 각 지방 군정(軍丁)의 번상(番上)을 일시 중지시키는 정번(停番)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재정상의 목적으로 군인을 정번시키고, 그 군인들에게 포(布)를 거두는 것은 19세기 순조대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시작은 정조의 장용외영(壯勇外營)인 화성(華城) 축조에서부터였다. 정조는 화성 축조를 위한 경비 조달을 목적으로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상번군 일부를 일시적으로 정번수포 하였는데, 그것이 순조대에 이르러 재정상의 목적을 위한 정번수포의 선례가 되었다. 즉, 순조대 이후 재정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어영청·금위영 등 상번군의 번상을 중단하고 그 대가로 포를 걷는 정번수포의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내용 및 특징

정조는 1794년(정조 18)과 1795년(정조 19)에 화성 축조에 필요한 경비를 중앙과 지방의 각 군영·병영에 할당하였다(『순조실록』 8년 8월 6일). 금위영·어영청은 그 조달을 정번수포의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어영청은 1번(番)당 5초(哨) 의 군사 중 매 초에 27명씩 도합 135명이, 금위영은 매 초에 25명씩 도합 125명이 번상 대신 포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초는 군대의 편제 중 하나로, 1초는 약 100명이었다. 중앙군의 정군(正軍)이 정번의 대가로 포를 낸 것은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동시에 정군에 딸린 자보(資保)도 수포 대상이 되었다. 즉 매 번당 어영청 135명, 금위영 125명의 정군과 그에 딸린 자보(資保)·관보(官保)가 모두 장용영에 이관되어 포를 내게 된 것이다. 화성 축조의 경비 마련을 위한 이러한 조치는 1795년에 시작하여 1808년(순조 8)에 끝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동안 어영청과 금위영은 1사(司) 5초의 편제를 가지면서도 군사의 수는 그것에 부족한 형편이었다.

정조 사후 1802년에 장용영이 혁파되는 일대 변혁이 있었지만 어영청·금위영에서 정번된 1초의 병력은 이전 상태로 복구되지 않았다. 숙위병을 보완하는 것보다 재정난이 더 긴박한 문제였던 것이다.

또 1816년(순조 16) 11월에 호조 판서박종경(朴宗慶)은 쌀을 사들이는 데 필요한 돈을 주조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돈을 주조할 경비가 없으므로 어영청과 금위영 군사의 정번수포로 이를 충당하자고 하였다. 그 구체적 내용은 상번군 4초에서 매 초에 27명씩 할당하여 총 108명의 정군을 정번하고, 정군과 그 자보가 함께 포를 내게 하되 20년을 기한으로 정번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건의는 별다른 이의 없이 채택되었다. 이로써 생기는 군사의 부족은 훈련도감에서 부족한 번상 인원을 보충하여 대신 서도록 조번(助番)하는 관례가 있으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19세기 초 장용영이 혁파된 후 중앙의 3군문 체제는 실상 훈련도감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어영청·금위영은 1사 5초의 기본적인 편제가 무시될 정도로 재정적인 필요에 의하여 정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변천

1808년(순조 8) 8월에 어영대장이요헌(李堯憲)은 그해 10월에 화성 축조를 위한 어영군 1초, 즉 135명의 정번수포 기한이 끝난다며,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였다(『순조실록』 8년 8월 6일). 즉, 번상군이 상번하는 일은 민읍(民邑)의 폐단 중 가장 큰 것으로서 번상을 감해 주면 민폐를 제거하는 효과가 적지 않고, 또 상번을 15년 만에 다시 시작하면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길 우려가 있으니 이들을 아예 번상시키지 말자고 하였다. 대신 부족한 1초의 군사는 서울에 거주하는[京居] 사람 중에서 용감하고 건실한 자를 뽑아 새로이 만들자고 하였다. 또한 1초의 경거군사(京居軍士)는 정번군과 그 자보에게서 걷은 포로 급료를 지급받게 하자고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중앙군의 규모를 크게 줄이는 것으로서 19세기 군사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참고문헌

  •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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