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안(田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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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토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기록한 장부.

개설

전안은 양안을 지칭하는 용어로, 토지조사사업인 양전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기록한 장부를 일컬었다. 조선시대에 토지는 국가의 재정 운영의 근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매 20년마다 양전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전안에 기록하도록 법전에 규정해 놓았다. 전안은 중앙의 호조와 각도 감영, 그리고 해당 읍에 각각 1부씩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로써 전안은 매해 전세 및 대동세 수취의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전안, 즉 양안에는 각 토지의 모양, 크기, 경작자, 결수, 토지의 사방 경계 표시[四標], 경작 상황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논이나 밭 외에 노전(蘆田)·마전(麻田)·저전(楮田) 등 특수한 작물을 재배하는 토지들도 기록하였다. 그리고 각 필지의 토지에는 토지 번호를 부여하고, 5결 단위로 묶어 하나의 자호(字號)로 편성하였다. 자호의 명칭은 천자문의 순서대로 부여하여 천자정(天字丁)·지자정(地字丁) 등의 순으로 편성하였다.

전안은 20년마다 새로 양전을 실시한 이후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양전이 막대한 행정력과 자금이 들어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잘 준수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종대에 공법(貢法) 도입 당시에는 옛 전안을 기준으로 새로운 전안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고(『세종실록』 25년 10월 27일), 전국적인 양전 대신 시간을 두고 도별로 양전을 실시하여 전안을 개정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6년 7월 24일). 숙종대에는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는데(『숙종실록』 43년 9월 22일), 이것이 조선왕조가 행한 마지막 양전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경자양안은 그중 일부가 현재까지 전해졌다.

변천

갑오개혁 이후에도 양전을 통한 토지 파악과 전안 작성을 통한 세금 징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897년 광무연간에 한 차례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고 이를 기반으로 『광무양안』이 작성되었다. 『광무양안』은 대부분의 기재 방식과 내용이 조선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일제시기에 토지조사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시대 전안 작성의 전통은 단절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용섭, 「양안의 연구」, 『사학연구』 7·8, 한국사학회,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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