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희(雜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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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예능인이 펼치는 곡예, 탈춤, 노래, 춤 등 갖가지 놀이.

개설

잡희(雜戲)는 줄타기, 땅재주, 재주넘기, 불 토하기, 탈춤 등 민간에서 공연된 여러 놀이를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백희(百戱), 잡기(雜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민간에서 공연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왕의 환궁 의례나 중국 사신 환영 의례 등에 포함되었던 나례(儺禮)에 잡희가 포함되어 연행되었다. 과거 급제자가 유가(遊街)할 때에도 잡희가 수반되곤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잡희는 천민 출신의 민간 예능인이 펼친 갖가지 기예이다. 민간뿐 아니라 궁중 행사에서 공연되기도 하였다. 궁중에서 대규모 나례에 잡희가 필요할 경우 나례도감의 관원이 서울과 지방에서 잡희를 공연할 재인(才人)들을 물색하여 동원하였다. 이때 불려 올라온 지방 재인들은 놀이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궁궐 행사가 끝난 뒤에도 사람이 많은 서울에 계속 머물며 귀향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잡희 종목은 이를 관람했던 사람들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1488년(성종 19)에 조선을 방문했던 중국 사신 동월(董越)이 보았던 잡희로는 불 뿜기[吐火], 어룡만연지희(魚龍曼衍之戱), 무동(舞童)의 춤, 원숭이 놀이, 땅재주, 곰놀이, 줄타기, 목발[躡趫], 사자놀이, 코끼리놀이가 있었다. 성현(成俔)은 춤, 공놀이[弄丸], 줄타기, 꼭두놀음, 죽간희(竹竿戱)를 언급하였다. 이처럼 잡희는 곡예의 성격을 지니는 놀이 종류가 많았고 볼거리 위주의 종목으로 구성되었다.

변천

잡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나타나며 고려시대까지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 궁중 행사에서 잡희가 등장하는 것은 나례 의식 때이다. 특히 왕이 환궁할 때와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행하는 나례 의식 때 산대를 설치해놓고 전국의 민간 예능인을 소집한 후 여러 가지 잡희를 화려하게 펼치도록 했다. 그러나 인조대 이후부터는 나례의 규모를 축소시키고 영조대와 정조대에는 드물게 나례를 설행하다가 폐지하여, 잡희 공연도 조선후기 궁중에서 약화되다가 결국 민간에서만 연행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부(朝鮮賦)』
  • 『허백당집(虛白堂集)』
  •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
  • 사진실, 『공연문화의 전통 -樂·戱·劇-』, 태학사, 2002.
  • 사진실, 『한국연극사연구』, 태학사, 1997.
  • 윤광봉, 『韓國의 演戱』, 반도출판사, 1992.
  • 사진실, 「공연예술의 기록, 나례청등록 1」, 『문헌과 해석』 창간호, 문헌과해석사, 1997.
  • 조원경, 「儺禮와 假面舞劇」, 『學林』 4, 연세대 사학과, 1955.
  • 조원경, 「仁祖時代의 儺禮謄錄」, 『鄕土서울』 4, 서울특별시,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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