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陽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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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중기 왕수인이 주창한 유학의 한 학파. 조선 양명학은 17세기 정제두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양명학 개설

양명학(陽明學)의 핵심 내용으로는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致良知), 사구교(四句敎)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내 마음이 바로 천리이다’라는 심즉리설은 모든 행위의 표준을 바깥 사물의 이치에서 찾는 주자학과 달리 내 마음에 이미 모든 이치가 갖추어졌기 때문에 오직 내 마음이 그대로 이치임을 자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지행합일설은 주희(朱熹)의 지(知)와 행(行)을 둘로 분리하고 지를 중시하는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의 대안으로 제시되어, 지 속에 행이 있고 행 속에 지가 있어 지와 행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셋째, 치양지설은 ‘내 마음의 양지를 구현한다’는 의미로, 원래 ‘치양지’란 『대학』의 치지(致知)와 『맹자』의 양지(良知)를 결합시킨 말이다. 치양지에서 ‘치’는 공부[行]를, ‘양지’는 본체[知]를 의미한다. 넷째, 사구교는 『대학』에 관한 왕수인(王守仁)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본체[心意知物]와 공부[正誠致格]에 대한 언급이 주된 내용이다. 왕수인 문하 사이의 사구교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즉 본체와 공부에 대한 논쟁은 왕수인 생전은 물론 사후에 왕문(王門) 후학이 분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2. 조선 양명학

양명학은 유교 지식인 사이에 주자학을 넘어 새로운 사유 체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상사를 통관할 때, 새롭게 대두하는 학풍이나 학파는 반드시 기존 학문의 유폐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토대 위에 등장하였다. 조선 양명학 또한 당시의 주자학이 교조적으로 흐르는 데 반하여 학문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등 주자학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대응함으로써 현실과 괴리된 관념성을 지양하고 이론과 실제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주자학에 비하여 세력이 지극히 미미하였다. 따라서 조선양명학은 당시의 학문 경향이 주자학 일색으로 흐르던 조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큰 세력을 형성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다만 사승(師承)이나 가학(家學) 형태로 전승되어 학맥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주자학이 조선 학계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기 이전 양명학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분히 개방적이었다. 전래 이후 상당수 학자들이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하였고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주자학이 조선 학계에 뚜렷이 자리 잡기 시작하자 양명학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양명학을 단순히 육구연(陸九淵)에서 진헌장(陳獻章)을 통하여 왕수인으로 이어지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이들의 학문이 모두 본심을 종지로 하는 선학(禪學)과 같은 것이라고 간주하여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조선 학계의 학문 상황에 대하여 장유(張維)는 ‘조선 유학사의 총론’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계곡만필』을 통하여 "중국의 학술에는 여러 갈래가 있어 정주학(程朱學)을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책을 끼고 글을 읽는 사람이면 모두 정주만을 외울 뿐 다른 학문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인보(鄭寅普) 또한 "조선에는 양명학파가 없고 오직 주자학파뿐이라 따로 주자학파라는 이름도 없었으며, 책상 위에 양명학 관련 책이 놓인 것만 보아도 이단사설(異端邪說)로 몰았다."며 조선의 학문 상황을 개탄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조선 학계의 학문 분위기가 정주학 일색으로 흐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위협할 요소가 있는 사상을 연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이런 속에서 이황(李滉)이 양명학을 공식 비판하면서 육왕학(陸王學)에 대한 지침으로 굳어졌고, 그의 반양명학적 태도가 문인들에 의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의 모델로 전승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양명학 비판서로는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과 「백사시교전습록초전인서기후(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두 편이 있다. 이황은 「전습록논변」을 통하여 양명학을 학술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니, 그 주요 내용은 양명학의 신민설(新民說)·심즉리설·지행합일설에 대한 비판으로 요약된다.

주지하다시피 양명학의 중심 내용은 치양지라 할 수 있는데, 이황의 양명학 비판에서는 치양지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황이 『전습록』의 전체 내용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문시되는 점이며, 혹시 전체 내용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양명학에 대한 연구, 특히 『전습록』 전체 내용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심도 깊게 진행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황 이후 조목(趙穆)·유성룡(柳成龍)·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도 비판을 하였으나 이황의 「전습록논변」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중 박세채와 한원진 등의 논변이 비교적 꼽을 만하다. 박세채는 정제두(鄭齊斗)의 스승으로 정제두가 양명학을 신봉하자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비판하면서 주자학으로의 회귀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원진은 「선학통변(禪學通辨)」과 「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을 통하여 육왕학 또는 양명학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이황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런데 이들의 논변은 대부분 지행합일설에 집중되어 있으며, 치양지설에 대해서는 이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비판을 하지 않았거나 논증이 절실하지 못하다.

치양지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은 이후 정약용(丁若鏞)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정약용은 양명학에 대하여 개방적인 경향을 보이며 육경사서(六經四書)를 주석하면서 육왕학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치양지설에 대해서만은 논리적으로 비판할 가치도 없다고 매섭게 물리쳤다.

조선 주자학자들이 양명학을 배척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자학 신봉자들이 주자학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양명학을 비판하고 배척하였다. 둘째, 노불(老佛)을 이단으로 보는 주자학자들은 양명학이 선학과 다름없다는 이유로 비판하였다. 셋째, 권력 투쟁과 관련하여 조정을 장악한 친정 세력과 재야의 사림 사이의 알력에서 재야 사림은 학문의 자유로운 토론과 연구를 지향하려고 하였으나, 친정 그룹은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을 정통화하려고 하였다. 넷째, 남인과 노론의 주자학 추존과 대조적으로 소론의 양명학 숭상 경향은 서로 반목을 이루었고, 끝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변천

조선시대는 주자학이 정통 이념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어 불교나 도가를 엄격하게 배척할 뿐만 아니라, 주자학에 어긋난 양명학도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그러나 정통 이념이 체제 교학으로 권위를 누리면서 정밀한 이론적 분석을 심화하여 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관념적 형식에 빠져 현실 변화에 효율적으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반성이 있어났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 들어 소수 지식인 사이에 새로운 방향으로 학문적 관심을 넓혀 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종래 조선에 양명학이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첫째, 홍인우(洪仁祐)의 『치재일기』 계축 6월 18일조를 근거로 한 1553년(명종 8)설, 둘째, 유성룡의 『서애집』 「양명집후(陽明集後)」를 근거로 한 1558년(명종 13)설, 셋째, 이황의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을 근거로 한 이황 당시설 등이 있다. 이와 달리 오종일 교수는 박상(朴祥)의 『눌재집』 연보와 김세필(金世弼)의 『십청헌집』을 근거로 양명학의 전래 시기를 1521년(중종 16) 이전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전습록』이 발간된 지 3년 뒤다.

17세기 조선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주자학을 연구하여 왔던 학술적 성과 위에서 스스로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이론적 문제점들을 토론하였고, 또 양명학에 대한 찬반 비판도 함께 진행하였다. 이들은 대개 지역적으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하였고, 학통으로는 주기적 경향을 취하였던 서경덕(徐敬德)이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계통이 중심이었다.

조선의 양명학은 정주학 일변도의 학문 풍토에서 이단시되고 혹심한 배척을 받았으므로 양명학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드러내어 연구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명학이 전래된 초기에 벌써 이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유성룡이 1594년(선조 27) 『선조실록』에서 "지금 사람으로 남언경(南彦經)에게 배운 사람은 양명을 많이 숭상한다."(『선조실록』 27년 7월 17일)고 지적한 대로 남언경과 이요(李瑤)가 바로 그들이다. 이처럼 조선의 양명학은 남언경과 이요에게서 전조가 보이지만, 선구자격인 최명길(崔鳴吉)과 장유에 이르도록 학파가 성립되지 않았다.

조선 양명학은 정제두에 이르러 집대성됨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활동하였던 정제두는 주자학을 정통 학술로 삼았던 조선 학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남언경과 장유의 학설을 수용하여 발전시키고 최명길의 학풍에도 접근하여 조선 양명학을 계통적으로 이어나갔을 뿐만 아니라, 정주학자 중에서 기대승(奇大升)과 윤증(尹拯)의 학문을 존중하여 자신의 양명학 체계에 수렴하였다.

주자학이 지배하던 학문 풍토 속에서 양명학에 대하여 심도 깊은 연구를 수행하던 그의 학문 태도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성학(聖學)에 대한 굳은 신념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이는 훗날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계승 발전되었다.

정제두는 1711년(숙종 37) 8월 경기도 안산에서 강화로 이주하는데, 이를 계기로 생을 마칠 때인 1736년(영조 12)까지 그곳에 거주하면서 정후일(鄭厚一)과 이광사(李匡師) 등에게 강학하였다. 이후 이영익(李令翊), 이충익(李忠翊), 정동유(鄭東愈), 이면백(李勉伯), 이시원(李是遠) 등을 거쳐 신작(申綽), 이건창(李建昌), 이건방(李建芳) 등에게로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를 일반적으로 ‘강화학파’라고 부른다. 강화학파의 학풍은 근대의 정인보에게 전수되었으며, 박은식(朴殷植)이나 송진우(宋鎭禹) 역시 정인보와 교유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의의

양명학이 조선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상계·문학계·사학계에 끼친 영향이다. 양명학의 주관적 정감주의는 개인의 사상과 감정 표현의 자유를 중시한다. 이러한 사고가 사상계에서는 기성의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학문 경향에 반대하여 자율성을 부르짖는 경향을 보이고, 문학계에서는 작가의 개성과 창의를 드높이며 문학 창작의 자유정신을 발휘하도록 한다. 또한 양지의 자유 의지에 따른 사관(史觀)은 주체적 자아를 부르짖고, 어떠한 권위나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독자적인 시비 판단을 강조함으로써 사대 사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지도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려 한 점이다. 양명학의 양지설과 지행합일설 등은 두 차례에 걸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위기 속에서 올바른 현실 판단으로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었다. 주자학자 위주의 척화론자와 양명학자 중심의 주화론자의 주장을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으나, 당시 척화파 학자들이 대의명분을 앞세운 채 현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데 반하여 주화파 학자들은 당면한 국가적 위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느냐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최명길·장유와 같은 학자들은 명분을 앞세운 가식을 배격하고 진실을 강조하는 양명학의 정신을 계승하여 온갖 치욕과 위험을 무릅쓰고 강화를 외쳤다.

셋째, 조선후기 실학파와 개화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는 서구의 종교 및 과학 사상, 청대의 고증학과 양명학 등을 들 수 있는데, 학문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주자학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비판하고 현실 타개를 중시하여 지도 이념과 현실 일치를 주장한 양명학의 사상과 정신이 실학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양명학은 주자학의 정통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통로를 열어 주었고, 실학사상의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시대 사상사에 의미 있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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