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맥(龍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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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에서 산들이 끊임없이 맥과 줄기를 만들어 연이어져 내려 온 자연의 지형지세를 일컫는 말.

개설

풍수지리에서 용맥은 단순히 외양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암반이 산맥의 뼈대를 이루면 그 위를 덮는 흙을 따라 흘러 온 생기를 간직하고 있는 일종의 생명체로 간주한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기맥과 기혈이 있음으로써 살아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풍수지리의 핵심은 생기가 용맥을 타고 내려오다 활용하기 좋은 장소를 형성하면 사람들이 그곳을 무덤이나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주 입지로 선정해서 인사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맥의 귀천과 장단, 생동감, 풍만한 기맥의 여부 등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우선 요구된다.

내용 및 특징

용맥은 산맥과 같은 말로써 풍수지리 이론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한 것이다. 용맥은 그 형세에 따라 크게 간룡(幹龍)과 지룡(枝龍)으로 구분한다.

풍수지리에서 용맥은 마치 인체의 혈관과 같이 절대 끊어지거나 단절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이에 상응하는 재난이 초래된다고 본다. 혈처 바로 뒤의 용맥 훼손은 특히 좋지 않다고 여겨 더욱더 보호하고자 한다. 『청오경(靑烏經)』과 『장서(葬書)』에서는 시신을 절대 매장해서는 안 되는 형세의 5대 불가장지, 7대 불가장지의 예로써 단산을 공통적으로 들고 있다. 단산은 용맥이 잘린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풍수사들은 초기부터 용맥의 단절을 매우 꺼렸는데, 1432년(세종 14)에 고중안(高仲安)·최양선(崔揚善)과 같은 이들은 세종에게 궁궐 뒤의 용맥 파괴는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세종실록』 14년 1월 15일). 1448년(세종 30) 목효지(睦孝智)는 세종에게 불당 설치는 불가하며 다시 용맥을 원상대로 복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세종실록』 30년 8월 4일). 또 조선시대에 30여 년을 끌어 온 헌릉(獻陵) 단맥 논쟁은 혈처 생기의 유입처인 용맥의 보호를 극히 중시했던 대표적인 예이다.

변천

용맥과 인사의 길흉은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은 『사기(史記)』「몽염열전(蒙恬列傳)」에 최초로 보인다. 「몽염열전」에서 진나라의 장수였던 몽염(蒙恬)은 진의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에서 요하 유역의 지맥을 많이 끊어 놓았으니 그것은 죽어 마땅한 죄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기원전부터 지맥 훼손이 재앙의 원인으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송대의 주자는 지맥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 전역 지세 용맥의 근간을 곤륜산으로 설명하였고, 우리나라의 수근목간이나 백두대간과 같은 용어도 용맥, 지맥, 산맥의 지속과 연속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국어(國語)』
  • 『장서(葬書)』
  • 『청오경(靑烏經)』
  • 『황제내경(黃帝內徑)』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혜정, 『중국 고전의 풍수지리 사상』, ㈜한국학술정보, 2008.
  • 장성규, 『백두대간의 역사』, ㈜한국학술정보, 2008.
  • 장성규·김혜정, 『완역 풍수경전』, 문예원, 2010.
  • 王乾, 『風水學槪論』, 中國, 西藏人民出版社, 2001.
  • 王玉德, 『神秘的風水』, 中國, 廣西人民出版社, 2004.
  • 徐善繼·徐善述 撰, 『地理人子須知』, 台北, 武陵出版有限公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