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부사(雲浮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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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절.

개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운부사(雲浮寺)는 영천은해사(銀海寺)의 산내 암자인 운부암(雲浮庵)을 지칭한다. 오늘날에는 은해사의 부속 암자이지만, 조선시대에 운부사로 칭해진 것으로 볼 때 독립된 사찰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운부사에서는 인종의 태봉(胎峯)이 있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 절을 증축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당시 선종판사(禪宗判事)였던 허응당보우(普雨)가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봉은사 주지직에서도 물러났다.

내용 및 특징

711년(신라 성덕왕 10)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는데, 이곳에 상서로운 구름이 떠 있었으므로 운부암(雲浮庵)이라고 하였다. 절 근처의 태실봉(胎室峯)에는 조선의 제12대 왕 인종(仁宗)의 태를 보관한 태실(胎室)이 있다.

1562년(명종 17)에는 승정원에서 경상감사정종영(鄭宗榮)이 사직을 원하는 서장(書狀)을 올린 일이 있었는데, 이해 3월 영천군수김염(金廉)이 운부사의 승려 옥준(玉峻)·신암(信庵)을 잡아들여 심문한 일이 있었다. 이들이 인종의 태봉으로 지정된 금지 구역 안에 있는 나무를 419그루나 베었고, 그 산에서 흙을 파서 기와를 구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자 옥준과 신암은 절에서 수행하는 승려를 통솔하는 지음승(持音僧)영수(靈琇)와 화주 거정(據定)이 별실(別室)을 속히 지으라고 독촉하기 때문에 신녕(新寧)과 대구(大丘) 등지에서 재목을 모아 수송해 온 것일 뿐 태봉의 나무를 벤 것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영천군수가 경상감사정종영에게 영수를 불러다 심문하고 싶다고 청하였다. 이에 정종영은 고을의 제반 업무를 관리하던 도사(都事)박거인(朴居仁)을 감사와 함께 보내어 사실 여부를 조사하였더니 나무를 베고 기와를 구워낸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영수를 옥준·신암과 더불어 한곳에서 범죄 사실을 추궁하게 하였다. 이때 영수가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해버렸다.

당시 선종 종단이 이 일을 내수사(內需司)에 보고하였고, 내수사에서는 사건에 대해 충분히 조사하고 난 이후에 감금해도 될 일을 무리하게 승려들을 감금하고 죽게 했다고 비난하였다(『명종실록』 17년 7월 3일).

이에 사헌부에서는 태봉의 나무를 베고 주산의 흙을 파서 기와를 구운 승려들의 행위는 중대한 범죄이며, 선종판사 역시 죄지은 승려를 두둔한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엄히 벌주기를 간청하였다. 왕은 이에 대해 사건의 전모를 조사하게 하고 승려들을 벌주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홍문관을 비롯하여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와 간단한 서식의 차자(箚子)를 지속적으로 올리자 소장(訴狀)을 선종에 올린 곡성 동리사(桐裏寺)의 계당(戒幢)을 남해의 섬에 유배 보내고 당시 선종판사였던 보우(普雨)의 직위를 삭탈하라고 명하였다(『명종실록』 17년 7월 4일).

운부사는 조선후기인 1860년(철종 11)에 화재로 소실되자 응허(應虛)와 침운(枕雲)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관음기도도량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1900년에 보화루(寶華樓)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영태, 『한국불교사』, 경서원, 2008.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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