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煙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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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변경과 해안의 극변초면(極邊初面)에 설치한 봉수.

개설

연대는 연변봉수(沿邊烽燧)의 다른 말로, 해안이나 변경의 제1선에 위치한 봉수를 일컬었다. 세종대에는 수로봉화(水路烽火)라고도 하였다. 연대의 봉수군은 무기를 휴대하고 근무하였다. 연대가 내륙 후방에 설치된 내지봉수(內地烽燧)에 비해 군사상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연대는 독자적인 방어체제와 생활 기반이 있었다. 연대 주위에는 방호 시설인 방호벽(防護壁)과 호(壕), 거화 시설인 연조(煙竈)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봉수의 운용과 봉수군의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가옥(家屋)·가가(假家) 또는 고사(庫舍)가 연대 주위나 하단 혹은 방호벽 안팎에 갖추어져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연대의 축조와 그 효용에 관한 논의는 세종대 초기부터 계속되었다. 또한 연대에서 근무하는 봉수군의 총인원과 교대 인원 및 보고 체계가 건의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대와 관련된 기사가 상당히 많은데, 『세종실록』을 중심으로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22년(세종 4년)에 경상도수군도안무처치사(慶尙道水軍都安撫處置使)는 봉수의 주변에 보루와 장벽 등 의탁할 곳이 없어 적에게 약탈을 당하므로 연대를 높이 쌓고 활 쏘는 집[弓家]과 화포와 병기를 설치하여 밤낮으로 그 위에 머무르며 적변(賊變)을 간망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각 도에 명하여 모두 연대를 쌓으라고 하였다(『세종실록』 4년 8월 19일). 이 기사로 볼 때 이때 전국 각지에 연대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1437년(세종 19)에는 의정부에서 각 도의 극변초면 중 봉화가 있는 곳에서는 연대를 높이 쌓고 인근의 백성 10여 명을 봉졸(烽卒)로 정하여, 번마다 3명씩 병기를 지니고 주야로 정찰[偵候]하되 5일 만에 교대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9년 2월 19일). 또 같은 해 7월에는 병조의 요청을 받아들여, 평안도 조명간(趙明干)·소용괴(所用怪)·어괴용(於怪用) 등지의 연대에 중국의 제도를 따라 대(臺)를 쌓고 그 밑에는 구덩이[坎]를 파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4일). 이 기록은 조선전기에 평안도 일부 지역에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연대가 축조되었으며, 방호 시설인 호가 설치되었음을 알려 준다.

1446년(세종 28)에는 의정부의 계에 따라, 각 도 연변(沿邊)의 연대 1개소에 봉화군(烽火軍) 10명과 감고(監考) 2명을 배치하고,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나누어 번을 서게 하였다. 또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상황을 중앙에 전달하도록 했다.

1447년(세종 29) 3월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장(呈狀)에 의거해 올린 ‘연변연대조축지식(沿邊烟臺造築之式)’을 통해 연대의 축조와 시설 등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세종실록』 29년 3월 4일). 이 규정은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연대의 구조 및 형태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날 한반도 남부 동해안과 남해안 및 서해안에는 이 규정에 따라 축조된 평면 원형의 연대와 호를 갖춘 연대가 일부 남아 있다.

변천

연변봉수에는 연기를 피워 올리는 높이 3m 내외의 석축 혹은 토·석 혼축의 연대 1기가 있었는데, 연변봉수를 연대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함경도에 위치한 일부 봉수를 연대로, 평안도에 소재한 일부 봉수를 수로봉화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평안도와 함경도의 일부 봉수를 연대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평안도의 일부 연변봉수를 해변해망(海邊海望) 또는 수로봉수(水路烽燧)로 표현하였다. 한편, 고지도인 『조선후기 지방지도(朝鮮後期 地方地圖)』에는 평안도에 위치한 일부 연변봉수가 해망연대(海望煙臺)·해안연대(海岸煙臺)·○○연대(烟臺)로 표기되어 있다.

다음의 [표]는 이철영(李喆永)이 경상도의 연대를 대상으로 만든 추정 복원도이다. 그중 [표]의 ①은 울산 천내봉수(川內烽燧)를 모델로 삼아 작성한 것이다. 원형의 연대 상부에는 밑이 없는 옹기굴뚝[煙筒]이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호가 깊게 파져 있다. 호를 건너 연대에 접근할 수 있도록 교량 시설이 배치되어 있으며, 연대 주위에는 무수한 나무 말뚝[木柵]이 설치되어 있다. 아울러 봉수 인근에는 봉수군의 거주지가 있는데, 전통적인 서민 가옥의 형태로 토담으로 된 벽에 초가를 이어 엮은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의 ②는 울산 이길봉수(爾吉烽燧)를 모델로 하되, 여러 유형의 연변봉수에서 특정 부분을 차용하여 작성했다. 연대 상부에는 연통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호가 둘러져 있다. ①과 마찬가지로 연대에 접근이 용이하도록 교량이 놓여 있고, 연대 주위에는 나무 말뚝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연대의 기단 아래에 창고 격인 고사와 5기의 연조가 반구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점은 다르다. 연대에 인접한 봉수군 주거지는 토담 벽에 초가를 엮어 만든 맞배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표]의 ④는 울진 표산봉수(表山烽燧)의 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복원 추정도이다. 봉수는 호를 파서 내부와 외부 공간을 나눈 뒤, 내부 공간에는 연대와 오름 시설을 배치하였다. 외부 공간에는 호와 인접해 고사와 불씨 보관 시설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배치하고, 경사로로 연대와 연결하였다.

[표]의 ⑤는 부산시에 위치한 12기의 봉수 중 석축의 원형 연대와 방호벽 및 호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아이봉수(阿爾烽燧)의 복원 추정도이다. 평면 원형의 호가 둘러져 있고, 방호벽 내 연대 상부에는 연통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아울러 방호벽 내에는 초가 건물 1동이 배치되어 있다.

[표]의 ⑥은 울산시에 있는 8기의 봉수 중, 연대를 둘러싸고 있는 석축의 방호벽 둘레가 216m로 국내 최대 규모인 유포봉수(楡浦烽燧)의 복원 추정도이다. 평면 마름모형의 석축 방호벽 안에 평면 원형의 호와 나선형 오름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연대 상부에는 연통이 설치되어 있다. 또 방호벽 내에는 기와로 된 건물과 고사가 배치되어 있다.

이상 6기의 봉수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 연대 중 울진·울산·부산 등지에 위치한 일부 봉수의 특정 유형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연대의 일반적인 구조 및 형태를 추정하는 참고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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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 김주홍, 『조선시대의 연변봉수』, 한국학술정보, 2010.
  • 서울대학교 규장각, 『朝鮮後期 地方地圖-平安道-』,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 김주홍, 「朝鮮時代의 內地烽燧」,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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