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사(城隍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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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터를 지켜 준다는 성황신을 모신 사당.

개설

사전(祀典)과 관련하여 고려나 조선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중국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조선중기 이후에는 사림들에 의한 보다 자발적이고 자체적인 통제가 행해졌다. 조선전기 사전 정비 사업이 시행된 이후 지방의 각 군현에서는 수령이 주재하여 사직단 제사와 지역 산천에 대한 제사, 성황단 또는 성황사 제사, 여단(厲壇)에 올리는 제사, 해신(海神) 및 도신(島神)에 대한 제사 등을 행하였다. 즉 성황사(城隍祠)는 군현 단위에서 수행하는 제사로서 조선시대 내내 존재해 왔다.

내용 및 특징

성황(城隍)이란 글자는 본래 『주역』 태괘(泰卦)의 상륙(上六) 효사(爻辭)에서 나왔다. 글자로 풀이하면 성황은 해자[隍]의 흙을 파서 높이 쌓아 만든 성지(城池)이다. 성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성황사를 만들어 옳게 죽지 못한 뭇 귀신을 제사지내도록 한 것이다. 송나라 사람 육유(陸游)가 지은 「진강부성황충우묘기(鎭江府城隍忠祐廟記)」에, 한나라 장수 기신(紀信)이 그 지방의 성황신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성황신으로 인물신이 모셔진 초기 사례로 보인다.

지방에서 성황신을 모시는 장소로는 단(壇)과 당(堂), 사(祠)가 있었다. 단은 건물이 없이 제단만 있는 경우로, 간혹 비를 막을 수 있도록 지붕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당’과 ‘사’의 구분인데, 이것은 주로 건축이 사제(私製), 즉 민간의 주도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관제(官制)로 이루어졌는가의 차이였다. 성황사는 읍치에서 불과 4~5리 정도 떨어져 있거나 성내에 설치되어 있는 반면에, 성황당은 읍치에서 10여 리 이상 떨어진 산중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과 ‘사’라는 용어가 별 뜻 없이 혼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이래 지방 토호들이 주도해 온 성황 건축물은 비록 관의 공인을 받지 않았더라도 대부분 사의 명칭을 가졌지만, 사전 정비 사업에 따라 각 군현에 관제 성황사가 하나씩 설치된 후 없어지거나 혹은 당의 명칭을 가지고 병존해 왔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지역에 따라 읍치에 별도의 성황 관련 시설이 없는 경우, 성황단만 있는 경우, 성황사만 있는 경우, 성황단과 성황당이 병존하는 경우, 성황사와 성황당이 병존하는 경우 등으로 나타났다. 이 중 후자의 두 경우는 기존의 성황당이 관제 성황사에 의해 흡수되거나 폐쇄되지 않고 토착적 성격을 띠며 공존해 온 결과이다.

1430년(세종 12) 8월 6일 예조에서 산천단묘순심별감으로부터 보고받고 왕에게 올린 건의 내용 중 각 지방의 성황사와 관련된 기사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목상(木像)과 이상(泥像) 등 성황사의 신상(神像)을 철거하고 위패로 대신하며, 위패는 하나만 두고 위패에 쓰는 명칭도 바로 잡는 일이다. 그 예로 전주의 성황위판(城隍位版)에는 전주부성황지신(全州府城隍之神)이라고 쓰고 1위만 모시며 설치된 신상도 철거해야 한다는 건의를 붙였다.

2. 제기(祭器)의 형태와 소재를 통일하되, 은그릇처럼 사치한 것은 공조에서 수납하고 봉상시의 제기인 놋그릇이나 자기 그릇을 쓰도록 한다.

3. 제물은 격식에 맞지 않는 것으로 대용하지 말며, 제사 때에 위판(位版) 대신 종이를 사용한 후 강물에 던지는 등의 관행을 중지하고 위판을 설치하도록 한다.

4. 지전(紙錢)의 사용을 금지한다(『세종실록』 12년 8월 6일).

변천

성황사는 고려전기부터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의 종교적 기구의 하나로 존재하여 왔다. 고려의 성황사는 지역마다 설치 과정과 이후의 발전 과정이 제각기 달랐으며, 중앙 정부의 관여 정도와 지방 토호 세력의 성격 여하에 따라 존폐되는 등 다양하게 전개되어 갔다. 조선시대 성황사는 중앙 정부의 지시로 설치되기도 했지만 지방의 토호가 자의적인 자위 기구로 세운 경우도 있었다. 특히 대개의 성황사가 조선중기 지방 수령으로 파견된 사족(士族)에 의해 음사(淫祀)로 몰리게 된 상황을 보면 전자보다는 후자의 상황이 더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정부는 초기부터 기존의 제의들을 유교식으로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지방에서의 각종 제의에 대한 정비는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산천·성황·풍운뇌우 등 여러 명칭이 붙던 단(壇)들은 성황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하여 재배치하였다. 이러한 정비 작업은 조선중기에도 이어졌다.

『성종실록』에 보면, 성종은 1478년(성종 9) 1월 27일 "음사를 금하는 법은 『경국대전』에 실려 있어 자세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도성 안에서 야제(夜祭)를 행하는 자, 사족의 부녀로서 친히 야제 및 산천·성황사에서 제사를 행하는 자, 사노비로서 사사(寺社)와 무격에게 시납(施納)하는 자, 거둥할 때에 노변에서 신에게 제사하는 자, 조부모·부모의 영혼을 무당의 집에 맞이하여 혹은 지전을 쓰거나 혹은 형상을 그리어 향사를 배설(排設)하는 자, 상인(喪人)이 무격에게 가서 음사를 행하는 자, 공창(空唱)·무격을 믿는 자 같은 것은 이미 금단하게 하였는데, 유사가 받들어 행하는 것이 점점 해이하여지니, 금후로는 한결같이 『경국대전』에 의하여 엄하게 규찰을 가하라."고 사헌부에 전지(傳旨)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성종실록』 9년 1월 27일).

그러나 이미 성황사의 설치와 재정비가 있었던 고려말기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토호가 장악했던 사적인 성격의 사묘(祀廟)들은 대부분 존속되었다. 지방의 토호가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기존의 풍속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종실록』에는 1516년(중종 11) 6월 3일에 기사관 유성춘(柳成春)이, "외방의 성황당의 일은 매우 허망한데도 성황신이 내려온다는 때에는 사족의 남녀까지도 모두 모여듭니다. 그 중에서도 나주 금성산(錦城山)의 성황이 더욱 심합니다. 신의 처의 아비 김숭조(金崇祖)가 나주목사로 있다가 갈려 온 뒤에 금성산 성황사에 내주는 쌀 60여 석을 거두어들이지 말 것을 청하여 윤대(輪對)에서 아뢰었는데 아직도 시행하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성황당사에 쌀을 내주면서 어찌 민속(民俗)의 폐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으나 왕은 이에 답하지 않았다(『중종실록』 11년 6월 3일).

이로써도 알 수 있듯 지방의 주도 세력이 사족으로 교체되기 시작하는 조선중기 이전까지 기존의 풍속에는 본질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즉 중기 이후가 되어야 이러한 제의나 관행들이 그 지방의 외래 사족들 또는 지방관으로 파견된 중앙의 양반 관료들에 의해 음사로 비판되면서 성황사에서의 무격 행위를 금하는 등의 금제(禁制) 조치들이 나온다.

지방관이 개입한 제사 중에는 유교적 사전을 모델로 한 제사도 있었지만 지역 나름의 관례나 풍습이 유지된 제사도 적지 않았다. 기존 지역 세력들의 향권에 따라, 또는 지역적 관례에 대한 지방관의 개입 정도와 지방관 자신의 제례관(祭禮觀)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외방 성황사는 폐지되거나 관제 성황사에 밀리게 된다. 민간에서는 밀려난 성황사를 서낭당으로 부르게 되는데, 이를 선왕당(仙王堂)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성황사에서 지전을 태워 귀신을 섬기는 방식은 무속이나 불교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제사 때 무당이 참여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황사가 유교식 사전 기구로 변하면서 자연히 이러한 무속 행위도 규제를 받았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성호사설(星湖僿說)』
  • 김태영, 「조선 초기 사전(祀典)의 성립에 대하여」, 『역사학보』58, 1973.
  • 유홍렬, 「조선의 산토신 숭배에 대한 소고」, 『신흥』9, 1937.
  • 정승모, 「성황사의 민간화와 향촌사회의 변동」, 『태동고전연구』7,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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