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왜인(受職倭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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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투화(投化) 또는 향화(向化)하여 벼슬을 얻은 왜인.

개설

수직(受職)제도는 고려시대에 여진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실시하였던 제도를 왜인에게 적용한 것으로, 중국의 외이기미책(外夷羈縻策)에서 유래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수직왜인(受職倭人)의 유형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조선에 투항하거나 향화하여 수직왜인이 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 거주하면서 수직왜인이 되어 통교 무역자로서 활동한 경우였다.

조선초기에 왜구 회유책 실시로 조선에 투항하거나 향화하는 항왜(降倭)가 급증하자 조선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토지와 재물·집 등을 주었다. 기록상 조선에서 처음으로 벼슬을 얻은 왜인은 왜구의 우두머리인 등육(藤陸, 일명 疚六)이었다. 등육은 1396년(태조 5) 12월 왜선 60척과 수백 명의 왜인을 이끌고 투항하여 선략장군용양순위사행사직겸해도관군민만호가 되었다. 그 후에도 비구시지(非疚時知)·임온(林溫, 일명 羅可溫) 등이 투항하여 수직왜인이 되는 등 그 수는 23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모두 대마도인이었으며, 특히 태조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대마도 정벌로 왜구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1444년(세종 26)에는 수직왜인의 범위가 항왜나 향화왜(向化倭)가 아닌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왜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에 거주하면서 처음으로 벼슬을 얻은 왜인은 이해에 해적을 포획한 공으로 호군이 된 일기(壹岐) 지방의 등구랑(藤九郞)이었다.

수직 범위의 확대는 조선의 왜구 대책이 왜구의 회유·투항·수직이라는 방식에서 일본 거주자에게 관직을 내리고 그들을 조선의 외교 질서에 편입시켜 왜구의 침입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왜구는 문인(文引)제도와 계해약조 등으로 통교에 제약을 받자 독자적인 통교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에 관직을 요청하여 수직왜인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건국 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에 거주하면서 벼슬을 얻은 왜인은 90여 명에 이르렀다. 지역별로는 대마도가 52명으로 가장 많고 구주 지방, 일기 지방, 장문 지방 순이었다. 이들은 왜구의 두목과 그의 일족, 피로인(被擄人)이나 표류인의 송환자, 조선에 침입한 적왜(賊倭)를 참수하거나 송환하는 데 협력한 자, 조선의 사행을 호송하였거나 일본국사·유구국사로 왕래한 통교상의 유공자, 대마도주의 특송과 그의 관하인이었던 자들로, 특히 왜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자와 대마도주의 관하인, 박다상인(博多商人)이 많았다.

항왜로서의 수직왜인은 관직에 상응하는 녹봉과 노비·마필·마료를 받은 반면, 통교왜(通交倭)로서의 수직왜인은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과 관직에 상응하는 의복과 품대가 주어졌으며, 이것을 착용하고 연 1회 친조(親朝)하여 토산품을 바치고 회사품(回賜品)을 받았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교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직왜인은 통교상의 특권을 부여받은 세견 1선의 정약자로 내조하면 제추사와 동등한 접대를 받았다. 수직왜인이 받은 관직은 동지중추부사로부터 사맹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으며, 대부분 서반의 무관직에 제수되었다.

수직왜인은 왜구의 토벌에 종군하였거나 조선에 침입하였던 적왜를 추포하고 왜구 및 일본의 정세를 제공하여 조선이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는 등 왜구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억제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또한 사절의 왕래 및 사행의 호송, 삼포왜인의 총치(總治) 및 쇄환(刷還), 피로인과 표류인의 송환, 의술·조선술·제련술을 전수하는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변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일 간의 통교는 단절되었으나 많은 왜인들이 조선에 투항하였다. 그중 처음으로 벼슬을 얻은 기록은 1594년(선조 27) 2월로, 사맹 벼슬을 내려 조선군에게 조총 사용법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후 수직왜인이 계속 증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자만도 19명에 이르렀다.

이들 수직왜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19명의 수직왜인 중 16명이 항왜였으며, 이들의 투항 시기와 수직 시기는 주로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과 1598년에 집중되었다. 둘째, 1594년부터 1596년(선조 29)까지의 수직왜인은 조총 제조 기술이나 사용법, 화약 제조법 등의 기술이 있는 자들이었으며, 주로 사정 벼슬을 얻었다. 셋째, 평조신(平調信)·평경직(平景直)·요시라(要時羅) 등은 항왜가 아니었음에도 수직왜인이 되었다.

넷째, 수직왜인 중에는 김귀순(金歸順)·김향의(金向義)·이귀명(李歸命)·사야가(沙也可, 일명 金忠善) 등과 같이 조선 정부로부터 성과 이름을 하사받은 자가 많았다. 다섯째, 평조신·평경직·요시라·마당고라(馬堂古羅)·세이소(世伊所)·신시로(信時老) 등 6명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수직왜인이 되어 조선과 통교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맺은 기유약조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회복되면서부터 임진왜란 시기의 수직왜인과는 달리 일본에 거주하면서 조선의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이 다시 등장하였다. 조선후기에 일본에 거주한 수직왜인은 『조선왕조실록』·『변례집요』·『증정교린지』 등의 자료에서 모두 16명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 6명은 임진왜란 중에 투항하여 벼슬을 얻고 전쟁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수직왜인이 된 자들이며, 나머지 10명은 조선전기처럼 일본에 거주하면서 벼슬을 얻은 자들이다.

1637년(인조 15) 겸대제(兼帶制)가 실시되면서 대마도의 세견선 수는 크게 줄어들었고, 수직왜인의 도항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수직왜인이 직접 조선에 도항하지 않더라도 잡물과 공미(公米)를 지급하였으나 1637년 이후부터는 직접 도항하지 않으면 작미(作米)를 지급하지 않았다. 그 결과 1637년 이후 수직왜인은 서서히 조일 관계사 속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의의

조선에서는 왜인 회유책의 일환으로 왜인에게 벼슬을 내려 그들을 조선의 외교 질서에 편입시켜 조일 간의 외교 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하려 하였다. 반면에 왜인들은 벼슬을 얻고 독자적인 대 조선 통교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조선 정부는 무역선의 성격을 가진 세견선의 증선을 최대한 억제하는 대신 그들에 대한 통제가 조금 더 용이한 수직제도를 적극 활용하여 대마도를 기미(羈縻) 관계의 외교 체제 속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 『변례집요(邊例集要)』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 『논상사미등록(論賞賜米謄錄)』
  • 『세선정탈등록(歲船定奪謄錄)』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한문종, 『조선전기 향화 수직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
  •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65.
  • 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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