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모사(御眞模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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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의 초상화를 대본으로 하여 다시 옮겨 그리는 일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의 초상을 영정 또는 어진(御眞), 어용(御容)이라고 하였다. 어진을 그리는 방식은 직접 현왕을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 선왕의 영정을 토대로 하여 다시 그리는 모사(模寫), 선왕이 돌아가신 후 기억에 의지하여 그리는 추사(追寫)가 있었다. 모사는 원본을 토대로 하여 그대로 옮겨 그리는 것이기에 이모(移模)라고 부르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선왕과 선후들의 어진은 궁궐 안 선원전에 봉안하였다(『세종실록』 20년 5월 19일). 궐 안과 각처에 흩어져 있던 어진들을 선원전에 모으고, 정기적으로 봉심하였다. 선원전에는 기왕에 있던 어진을 옮겨 모시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 그려 봉안하기도 하였다. 1444년 외방 진전 4곳에 있던 태조 어진을 다시 그리고, 궐 안에 있던 태종의 어진도 다시 그려 선원전에 봉안했다. 이때의 기록에는 어진을 성용(聖容), 수용(晬容)이라고 칭하였고, 다시 그리는 일은 개화(改畵)라고 표현하였다(『세종실록』 26년 10월 22일). 1545년에는 중종의 어용을 추사하였다(『인종실록』 1년 1월 22일). 중종이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아 옮겨 그릴 원본이 없자, 어용의 기억을 더듬어 그린 후 인종과 내정에서 살펴보고 제대로 그려졌다고 인정하였다. 훗날 이것이 너무 닮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사왕(嗣王)과 내정에서 인정한 본이라 하여 수리한 후 보존하였다(『명종실록』 4년 9월 14일).

임진왜란 이후 외방의 태조 진전이 파괴되고, 도성 안의 선원전도 불타버려 많은 선왕들의 어진이 소실되었다. 조정에서는 외방에 있는 태조 진전을 우선적으로 복구하였고, 이를 위해 보전된 경기전 어진을 토대로 하여 모사한 후 봉안하였다. 우선 광해군대에 경기전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평양의 영숭전으로 보내려 하다가 당시 정세로 인하여 여의치 않자 도성 안의 남별전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1688년 숙종이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다시 모사하여 증건한 남별전 제1실에 봉안하여 도성 안에 있는 태조 진전을 성립시켰다. 1737년 영조가 영희전 제2실의 세조 어진을 재모사하여 봉안하였고, 1748년에는 선원전에 있던 숙종 어진을 다시 모사하여 영희전 제4실에 모셨다.

한편 1713년에는 이미 있던 숙종 어진이 진면목을 반영하지 못하였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도감을 설치하고 어진을 그리는 일을 공식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때 도감의 명칭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미 있는 어진을 옮겨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왕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리는 일이므로 어진모사 대신 어진도사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이후에는 ‘모사’와 ‘도사’라는 용어를 각각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太祖)影幀模寫都監儀軌)』
  • 『(세조)영정모사도감의궤((世祖)影幀模寫都監儀軌)』
  • 『(숙종)영정모사도감의궤((肅宗)影幀模寫都監儀軌)』
  •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肅宗)御容圖寫都監儀軌)』
  • 『(고종)어진도사도감의궤((高宗)御眞圖寫都監儀軌)』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 27, 2004.
  • 윤진영, 「장서각 소장 『어진도사사실』의 정조~철종 대 어진도사」, 『장서각』 11,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