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간주(石間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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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산화철이 주성분인 철 안료를 부르던 말.

개설

석간주(石間朱)는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적색의 점토질 안료로 철화백자나 철채자기를 제작할 때 사용하였다. 석간주로 문양을 그린 철화백자는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철화백자가 유행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던 청화백자의 안료인 회회청(回回靑)의 수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정묘호란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재정 손실로 고가의 회회청 안료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석간주를 회회청의 대체 안료로 사용하여 왕실용 백자를 제작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후인 1618년(광해군 10)에 조선은 조정에서 거행하는 연향(宴享)에 사용할 청화백자 화준(畫樽)으로 화룡준(畫龍樽)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회회청을 중국으로부터 들여오지 못했다. 이에 자기의 제작을 담당한 사옹원이 그 대안으로 문양이 없는 백자 위에 임시로 그림을 그린 가화(假畫) 자기를 사용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3일). 가화용준(假畫龍樽)은 거추장스럽고 옮기는 과정에서 그림이 벗겨지기도 하여 문제가 많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조대에도 계속되었다. 1634년(인조 12)에 사옹원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연향에 쓰일 용준(龍樽)을 제작할 때 석간주를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석간주로 만든 자기를 철화백자라고 한다.

청화 안료의 수급 문제로 인해 곤란스러운 상황은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관요(官窯) 운영의 제도적인 정비를 시도한 숙종대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였다. 관요에서는 17세기 후반까지도 왕실용의 최고급 자기를 철화백자로 제작하였고, 청화백자는 18세기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18세기 후반 영조와 정조 연간에는 청화백자가 왕실 이외에 사대부와 하급 관리까지도 가질 수 있는 상품(商品)이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화백자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청화백자 사용금지령은 1710년(숙종 36)에 16세 나이로 사옹원 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를 맡은 바 있는 영조가 1754년(영조 30)에 자기에 그림을 그릴 때 예전에는 석간주를 썼다고 말하고 용준의 제작 외에 회회청을 써서 청화백자를 제작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영조실록』 30년 7월 1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방병선,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 우민아, 「조선시대 관요 철화백자의 성격 변화」,『미술사연구』 25호, 미술사연구 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