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력(授時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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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나라 때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역법(曆法).

개설

수시력(授時曆)은 1276년(원 지원 13) 원나라 세조(世祖)의 명으로 태사령(太史令)왕순(王恂)·허형(許衡)·곽수경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1280년(원 지원 17)에 완성되어, 이듬해 반포된 역법이다. 수시력은 곽수경을 중심으로 1276년부터 5년간의 준비기간을 두고 정밀한 천문 관측을 하고 여러 역법을 참작하여 만들어진 역법이다. 수시력은 1368년 명의 건국과 함께 대통력(大統曆)으로 대체되었고, 서양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이 채용된 1645년 이전까지 중국 역법을 대표하였다. 수시력의 우수성은 정밀한 관측과 창의적인 계산법에 있다. 수시력법은 동지(冬至) 일시를 정확히 측정하여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정했으며 동지에서의 태양의 위치가 확정되어 있다. 또한 달의 운행을 추적하여 일식과 월식의 한계를 정했다. 계산에서는 적년(積年)과 일법(日法)을 폐지하고 1년의 길이가 시대의 경과에 따라 점차로 변동된다는 소장법(消長法)을 채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선왕대에 최성지(崔誠之)가 수시력의 계산법을 전수받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내용 및 특징

전통시대 한국의 역법은 중국 역법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중국 당대(唐代)와 송대(宋代)는 너무 빈번히 개력(改曆)이 진행되었는데 이때는 천문학적 결함을 개선하기 위해 개력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로 이름만 바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왕조당 1력(曆)이었던 원칙이 황제가 바뀔 때마다 개력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당대 290년간 8회의 개력이 있었고, 송대 약 320년 동안에는 18회의 개력이 있었다. 더욱이 송대의 역법은 천문학적 발전이 전혀 없는 당대의 아류였다.

중국이 빈번한 개력을 하는 사이, 신라말기 이후 고려는 계속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선명력에도 오차가 생겨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1052년(고려 문종 6)에 김성택(金成澤)의 십정력(十精曆), 이인현(李仁顯)의 칠요력(七曜曆), 한위행(韓爲行)의 현행력(見行曆), 양원호(梁元虎)의 둔갑력(遁甲曆), 김정(金正)의 태일력(太一曆) 등 다양한 역법들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들 역법들은 이름만 전할 뿐, 그 자세한 내용과 채택 여부는 알 수 없다.

고려가 수시력을 사용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원의 사신 왕통(王通)이 수시력을 전해주면서 부터이다. 왕통은 수시력이 좋은 관측기구로 관측하여 정확한 값을 얻었고, 적년과 일법 및 월법(月法)을 쓰지 않기로 한 좋은 역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당장 수시력을 채택할 수 없었고, 그 후 충선왕 때에 최성지가 왕을 따라서 원에 가서 수시력법을 얻어와 고려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원나라는 1281년 수시력으로 개력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동안 사용하였던 송의 대명력(大明曆)이 너무 오래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지 않아 수많은 오류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1276년부터 5년간의 준비 기간을 두고 정밀한 천문 관측을 하는 한편, 여러 역법을 참작하여 마침내 완성하였다. 수시력의 이름은 『상서(尙書)』의 경수민시(敬授民時)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수시력 편찬 사업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허형, 왕순, 곽수경이다. 허형은 고금의 역리에 밝았고, 왕순은 산법(算法)의 묘를 가졌으며, 곽수경은 기계의 제작에 능한 관측가로 보통 수시력의 대표작자로 알려져 있다.

수시력의 우수성은 정밀한 관측과 창의적인 계산법에 있다. 수시력법에서는 동지일시를 정확히 측정하여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정하였으며, 통지에서의 태양의 위치가 확정되어 있다. 또 달의 운행을 추적하고 일월식의 한계를 정하였으며 28수의 거성(距星)을 측정하고 일출입 시각을 상세히 구하였다. 계산에서는 일월운행에 초차법(超差法)을 쓰고 적년과 일법을 폐지하고 소장법을 채택하였다. 소장이란 1년의 길이가 시대의 경과에 따라 점차로 변동된다는 의미이다. 수시력은 1368년 명의 건국과 함께 대통력으로 대체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통력은 세실소장법(歲實消長法)을 폐지하여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고정하고 상원(上元)을 바꿔서 수치를 간단히 하였을 뿐, 내용에서는 수시력법과 거의 동일하다. 실제로 수시력은 이슬람역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역법으로서 가장 좋은 중국류의 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계산법에 있어서 수시력은 선명력의 적년이 700만 년 이상이나 되는 방대한 수치임에 비해 그 기점을 전년 동지의 오전 0시로 정하여 매우 간편하였다. 대신 여러 가지 응수(應數)를 구해 천문상수로 두어 정확성을 기했는데, 예를 들어 1281년 수시력이 시행된 그 이전 해인 1280년 동지시각으로부터 그 직전의 갑자날 자정까지의 일시를 기응(氣應), 삭까지의 일시를 윤응(閏應)이라 하여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시력의 상수(常數)

일주(日周) 1만 0000분

세실(歲實) 365만 2425분

삭실(朔實) 29만 5305분

기응(氣應) 55만 0600분

윤응(閏應) 20만 0600분

세여(歲餘) 5만 2425분

통윤(通閏) 10만 8753분 84

월윤(月閏) 9062분 82

순윤(旬閏) 60만

세여 = 세실 - 360만

월윤 = (세실 ÷ 12) - 삭실

통윤 = 월윤 × 12 = 세실 - (삭실 × 12)

위에 제시되어 있는 수시력의 상수를 바탕으로 하여 동지 일시를 구하면, 동지 기점 이후의 연수에 세실을 곱하여 기응을 더해서 기점 직전 갑자날 자정부터 구하려는 해의 천정동지(天正冬至)까지의 일수를 구한 후 60일씩 빼면 동지일의 간지와 시각이 얻어진다. 또 구하려는 해의 천정동지 직전의 평균 합삭(合朔)을 구하려면 기점 이후 천정동지까지의 일수에 윤응을 더해 이것을 삭실로 빼고, 앞에서 구한 천정 동지일시에서 감하면 평삭의 간지일시(干支日時)가 얻어진다.

변천

수시력으로 개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는 1370년(고려 공민왕 19)에 명나라의 대통력으로 다시 개력을 했는데, 대통력은 수시력과 역원(曆元)과 세실소장법만 다를 뿐, 그 밖에는 모두 같았으므로 역법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해 고려의 사신 성준득(成准得)이 명나라의 태조로부터 대통력을 받아와서 같은 이름으로 이 역이 반포되었다. 수시력이 완전하게 우리나라에 수용된 것은 조선 세종대이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역법은 고려말과 같이 수시력과 대통력을 사용하고 일부는 선명력을 썼으나, 1433년(세종 15)에 일월식의 계산법인 교식(交食)과 오성(五星)만이 입성(立成)이 없다 하여 정인지(鄭麟趾), 정초(鄭招) 등에게 추보(推步)하게 하고, 명나라 원통(元統)이 편찬한 『대통통궤(大統通軌)』에서 오류를 조금 고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게 했다. 그 원리는 기본적으로 수시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대통력을 포함한 수시력법은 1653년(효종 4)까지 약 350년간이나 명맥을 이었으며, 중국에서는 1644년까지 약 400년간이나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박성래, 「<수시력>의 수용과 <칠정산>의 완성」, 『한국과학사학회지』 24권 제2호, 2002.
  • 이은성, 『曆法의 原理分析』, 정음사, 1985.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 山田慶兒, 『授時曆の道』, 東京, みすず書房,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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