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구시(實事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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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말.

개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후한서(後漢書)』「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 나오는 "학문을 닦아 옛것을 좋아하며,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구한다[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유래된 말이다. 청(淸)나라 초기에 경전의 자구에 대해 엄격하게 고증할 것을 주장하였던 고증학자들이 성리학이나 양명학이 지나치게 관념론에 빠지는 것을 배격하면서 이 표어를 내세웠다. 실사구시를 주창한 청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대진(戴震)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사상은 조선후기에 유입되어 조선에 실학의 학풍이 크게 일어나게 하였다. 유형원이나 이익, 정약용 등은 경세치용에 주력하였고,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이용후생, 김정희 등은 고증학에 치중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서 실사구시라는 용어는 양득중(梁得中)이 영조의 부름을 받게 되자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떠받들고 유학을 보위한다[扶世道衛斯文]’는 주장이 허위임을 주장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4자를 모토로 정치를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던 데에서(『영조실록』 5년 2월 6일) 비롯되었다. 양득중은 당시 정치·사회적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영조에게 추천하여 공간되게 하였다. 실사구시가 학문적 차원에서 제기되고 실천된 것은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서이다. 김정희는 『실사구시설』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일삼아 근거가 없는 빈약한 술수로 방편을 삼고, 옳은 것을 구하지 않으며 선입견을 위주로 학문을 하면 성현의 도에 배치된다."라고 하여 현실에 근거한 학문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학문은 박규수, 남공철 등을 통해 개화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 임형택, 「실사구시의 학적전통와 개화사상」,『한중실학사연구』, 민음사, 1998.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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