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승(使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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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임무를 띤 승려.

개설

사승(使僧)은 승려이면서 사신(使臣)의 신분으로 국가의 외교적 업무를 담당한 승려를 말한다. 대표적인 사승으로는 삼국시대에 신라에 온 중국 양나라의 원표와 조선시대의 사명당유정을 들 수 있다. 특히 유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 외에도 사신으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해 매우 큰 활약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일본과 유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 등에서 파견한 사신 중에도 사승들이 자주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사신단의 대표자로 오거나 혹은 사신 수행단으로 참여하여 외교 업무도 담당했다.

내용 및 특징

(1) 한국 최초의 사승 원표

한국 불교사에서 사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 흥법(興法) 아도기라(阿道基羅)에 보인다. 신라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서 굴을 파고 숨어 지내며 불교를 포교할 즈음에, 중국양나라에서 사승 원표(元表)를 통해 신라에 의복류와 향을 보냈는데, 왕과 신하 모두 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몰랐다는 기록이 있다.

(2) 조선시대의 사승 사명당

조선시대에는 일본, 유구국 등에서 파견된 외국인 사승의 왕래가 매우 빈번하였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그 근거지였던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등 일본에 대한 강경 외교를 구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의 통상 요구에 응하며 화친책을 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일본인 사승이 조선에 내왕하게 되었다. 일본인 사승은 대개 일본 국왕이나 쇼군, 다이묘 등이 파견한 외교 사절로 일반 사신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공으로 일본의 토산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조선 조정에서 상당량의 하사품을 받아갔다.

조선시대에 사승으로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인물로는 사명당(四溟堂)유정(惟政)을 꼽을 수 있다. 유정은 서산(西山) 대사(大師) 휴정(休靜)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승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명당의 더욱 큰 업적은 사승으로서 탁월한 외교적 성과를 올린 데 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 중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일본과의 강화(講和) 회담에 나가 의견을 조율했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에 4차에 걸쳐서 왕래하며 평화 교섭을 타진했는데, 제1차는 1594년 4월 13~16일, 제2차는 1594년 7월 12~16일, 제3차는 1594년 12월 23일, 그리고 제4차는 1597년 3월 18일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이 조선 정부에 강화를 청해오자, 사명당은 1604년 8월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섬에 파견되었다. 사명당은 강화 사승의 신분으로 그해 12월 교토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본법사(本法寺)에서 회견했다. 회견의 성과로 1605년 4월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被擄人) 1,300여 명(혹은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유정은 종2품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유정 대사의 이러한 외교적 성과로 조선과 일본도쿠가와 정권과의 우호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게 되었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 첫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3) 일본의 사승

조선전기에는 일본 국왕과 쓰시마 섬주인 소가[宗家]에서 사승을 빈번히 파견하여 조선과의 친선을 도모하면서 대장경(大藏經), 가사(袈裟), 동전, 희귀한 토산물 등을 요구하며 조선 조정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특히 세종 때, 일본 사승인 규주(圭籌)는 조선 조정에 토산물을 바치고 일본 국왕의 요청이라고 하면서 해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大藏經板) 전체를 요구하는 소동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세종실록』 5년 12월 27일). 성종 때 일본 국왕의 사승 수린(壽藺)은 조선 조정에 벼슬까지 요구하여 선종대선사(禪宗大禪師)를 제수받기도 했다(『성종실록』 1년 9월 28일). 조선후기에는 일본 사승의 파견이 그다지 없었는데, 이는 막부(幕府)의 요청에 따라 조선 정부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는 동안 대규모의 통신사를 12회에 걸쳐 파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구국은 조선초부터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간혹 일반 사신과 함께 사승이 파견되어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유구국에서 온 사승 역시 국왕의 친서를 전하고 자국의 단목(丹木), 금난(金爛), 상아(象牙), 우각(牛角), 목향(木香), 소목(蘇木) 등과 같은 물품을 바치고, 조선으로부터 포(布), 호피(虎皮), 인삼, 대장경, 종이 등의 답례품을 받아갔다(『성종실록』 11년 7월 8일). 유구국의 사승이 조선에 들어와 취한 예는 일본에 비해 훨씬 극진했고, 그다지 무리한 물품 요구도 없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사명대사집(四溟大師集)』
  • 이지관 편, 『가산불교대사림』,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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