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辭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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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중에서 사와 부를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사부(辭賦)는 본래 초사(楚辭)와 한부(漢賦)라는 두 가지 문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만 한나라 때 이후로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사부라고 합쳐 불렀다.

사(辭)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만든 시가 형식인 초사(楚辭)를 말한다. 굴원이 지은 『초사』에서 「이소(離騷)」가 가장 이름 높았으므로, 초사를 초소(楚騷) 혹은 소체(騷體)라고도 불렀다. 초사는 『시경』의 정형화된 4언 틀을 부수고, 5~7언 등을 적절히 뒤섞어 자유롭게 운용한 산문화된 장구(長句)를 사용했다. 언어 면에서는 당시에 쓰인 구어(口語)를 많이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혜(兮)’자 등 특별한 뜻이 없는 허사(虛詞)를 운용하였다. 아울러 시 형식의 편장(篇章) 구조를 확대하여, 서정에 서사를 겸하거나 서정과 영물에 의론을 겸하는 등 산문 성분을 대폭 강화하였다.

한편 부(賦)는 창작 기법상 사물을 나열적으로 진술하고 호기 있게 과장하며, 체제상 시와는 달리 음악에 맞춰 가창할 수 없는 문체 양식을 가리킨다. 문학 형식의 하나인 부는 『시경』과 『초사』의 영향을 받았다. 『시경』의 육의(六義) 곧 풍(風)·부(賦)·비(比)·흥(興)·아(雅)·송(頌) 중에서 사실을 자세히 진술하는 ‘부’의 창작방법을 계승하였고, 『초사』로부터 장편 구성과 화려한 문체로 사물을 그려내고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감정을 풀어 보이는 특징을 흡수하였다. 그러나 부는 『시경』이나 『초사』보다 산문성이 더 강하다는 점이 다르다. 『초사』는 『시경』보다 산문 요소가 많고, 부는 『초사』보다 산문성이 강하다. ‘부’는 ‘사’보다 접속사나 구말어(句末語)를 많이 사용하고, 주객의 문답을 가설하며, 산문체 어구와 운문체 어구를 적절히 안배하는 등 산문화된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사의 체제는 『초사』의 뒤로 근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에 비해 부는 장기간 변화하였다. 명나라 때의 학자 서사증(徐師曾)은 『문체명변(文體明辨)』에서 부를 고부(古賦), 배부(俳賦), 율부(律賦), 문부(文賦)로 나누어 개괄하였다.

고부는 사부(辭賦) 또는 고체부(古體賦)라고도 한다. 발생 시기가 빠르고, 대구(對句)와 성률(聲律)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고부는 대개 편폭이 길고 문답 형식을 많이 채용하며, 구식에서 장단을 뒤섞고 운문 중에 산문을 많이 끼워 넣었다.

배부는 변부(騈賦)라고도 하는데, 고부를 기초로 발전되어 나온 새로운 부체이다. 위진시대에 비롯되어 남북조에서 성행하였다. 자구의 엄밀한 대구와 음절의 경중 조화, 고사를 사용함에서 화려함과 교묘함을 추구하였다.

율부는 당송시대 과거 시험에 채용된 일종의 시체부(試體賦)이다. 배부의 대구를 더 기교화하고 성률을 화협하는 한편 압운도 엄격히 제한한 것이다. 대개 고시관이 제목을 지정하는 동시에 8개의 운자를 내어 8류의 운각(韻脚)을 규정함으로써, 수험생에게 400여 글자의 부를 짓게 하였다.

문부는 당송 고문 운동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부체이다. 배부와 율부가 대구를 맞추고 압운을 운용하는 방면에서 제한을 두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문에 근접하여 더욱 산문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구식은 4언·6언을 위주로 하면서 장구(長句)를 대량으로 섞어서 연결사 이외에도 ‘지(之)·호(乎)·자(者)·야(也)’ 등의 허사를 사용하였다. 운자를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자유로웠고, 보통 문답 형식을 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외교 문서로 사용하는 표전(表箋)을 작성해야 했으므로, 사부를 지어 사륙변려문(四六騈驪文)의 문체와 전고 사용의 수사법을 익혔다.

변천

조선 현종 및 숙종 때의 문신인 김석주(金錫冑)는 고려시대 후기의 이규보(李奎報)로부터 조선시대 후기의 신정(申晸)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사부 57편을 뽑아 『해동사부(海東辭賦)』 2권 2책을 엮었다. 김석주의 『식암유고(息庵遺稿)』에 그 서문이 전한다.

사부는 꾸미는 데에 치중하여 문학적 재능과 관련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교린(交隣)사대(事大)의 교령(敎令) 및 사명(辭命)에 사용되었으며, 또 문학을 공부할 때도 사(詞)와 부(賦)를 익혀서 문리(文理)를 안 뒤에야 대책(對策)을 시험하여 시무(時務)를 통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매우 중시되었다(『중종실록』 30년 12월 11일). 특히 조정에서는 문신들에게 표전을 연마할 것을 강조하며, 문과(文科)의 중장(中場), 중시(重試), 춘추중월시(春秋仲月試) 등에서 표전을 주요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표전은 사륙변려체로 지어야 하므로, 문신들은 평소에 사부를 짓는 능력을 길러야 했다. 한편 주택이나 공공건물을 지은 뒤 상량(上樑)할 때, 정통 사부는 아니더라도 사부의 풍격을 지닌 문체로 상량문을 지어 낭독하였다.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개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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