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흉(三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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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년(중종 32)에 권력을 농단하다가 축출된 김안로·허항·채무택 3명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김안로(金安老)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의 사림이 물러난 뒤 발탁되어 이조 판서에 등용되었다.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駙馬)가 되자, 이를 계기로 권한을 남용하면서 조정 내외의 지탄을 받기 시작하였다. 1524년에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탄핵으로 유배에 처해졌다. 김안로는 유배 중인데도 불구하고 대간(臺諫)을 움직여 1531년에 ‘삼간(三奸)’으로 지목된 심정·이항·김극핍을 축출한 뒤, 곧바로 다시 서용되었다[『중종실록』 26년 윤6월 15일].

이후 김안로는 동궁에 대한 저주 사건을 통해 동궁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보익동궁(輔翼東宮)’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1535년에는 좌의정에까지 등용되었다. 동시에 김안로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과 더불어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였다. 1534년에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경원대군(慶原大君)을 낳은 뒤, 김안로는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1537년에 허항·채무택과 함께 처단되었다[『중종실록』 32년 11월 3일].

내용 및 특징

삼흉은 이에 앞서 출현했던 삼간과 더불어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 등의 사림이 축출된 뒤 권신(權臣)이 등장하여 정치 운영을 농단하던 정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1531년 김안로는 삼간이 처단된 뒤 유배에서 돌아와 동궁 보호를 구실로 하여 실권을 장악하였고, 허항·채무택 등과 더불어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였다. 이들 3명 또한 정유년인 1537년에 처단되면서,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졌다. 결국 삼간·삼흉은 기묘사화로 사림이 축출된 이후 사림의 재서용이 이루어진 1538년까지의 정치 상황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정치 운영을 농단하던 인물을 일컬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김돈, 『조선 전기 군신 권력 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김돈, 『조선 중기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9.
  •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연산군·중종과 그 신하들』, 역사비평사, 2007.
  • 이병휴, 『조선 전기 사림파의 현실 인식과 대응』, 일조각, 1999.
  • 최이돈, 『조선 중기 사림 정치 구조 연구』, 일조각,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