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군(廂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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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궁궐을 벗어나 행행할 때 임시로 전후좌우에 구성된 호위 군사 집단.

개설

상군(廂軍)은 조선전기부터 왕의 호위 부대로, 왕이 궁궐 외부로 행행할 때 임시로 편성하던 부대였다. 조선시대 상군은 중국 고대의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금군(禁軍)과 상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당·송대에는 각지의 용장(勇壯)한 자들을 선발하여 금군으로 삼고 나머지는 상군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상군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조선전기의 상군은 어가 행렬의 어느 곳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전상군(前廂軍) 또는 선상군(先廂軍)·후상군(後廂軍)·좌상군(左廂軍)·우상군(右廂軍)으로 편성되어 운영되었다. 부대의 규모는 시대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성종대의 경우 1475년(성종 6)에 광주(廣州) 정금원(定今院) 벌판에서 좌상군과 우상군을 사열(査閱)할 때의 병력이 28,115명이었다. 반면 조선후기의 상군은 수백 명에 불과하여 조선전기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훈련도감과 같은 군영에서 상군을 조직하였으며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이 동원되었다. 또한 좌·우상군보다는 대부분 전상군과 후상군으로 어가의 앞뒤를 호위하였다.

내용 및 특징

상군의 조직과 임무가 조선전·후기에 걸쳐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시대적 전술의 변화와 군제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전기의 상군은 좌우로 편제되어 군사 훈련에서 왕의 사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동원되었다. 예컨대 중종대인 1533년(중종 28)에는 왕이 직접 상군을 사열하기도 했다. 이때 사열의 모습을 보면, 대가(大駕) 앞에서 좌별군장기(左別軍將旗)를 들면 좌상군의 전방에 소속된 날랜 군사들이 유격장기(遊擊將旗)를 흔들어 응답하고 나서 즉시 출전하였다. 또한 우별장기(右別將旗)를 들면 우상군의 전방에 소속된 날랜 군사들이 응장기(鷹將旗)를 흔들어 응답하고 나서 즉시 출전하여 좌상군을 도왔다. 이것은 왕이 깃발과 같은 형명(形名)으로만 명령을 내려도 상군을 운영할 수 있게 하는 연습이었다. 상군에게 형명을 이용하는 것은 사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 위에서 짐승들을 몰이하거나, 평지에서 짐승들에게 활을 쏠 때 깃발을 이용하였다.

상군은 왕의 사냥 몰이꾼으로 자주 활약하였는데, 1464년(세조 10) 인왕산에서 호랑이를 몰아 잡기도 하였다. 세조대에는 도성 인근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칠 때 상군을 동원하여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였다. 행행 중에도 사냥에 동원되었는데, 1465년 세조가 온양에 치료차 행차할 때 여우를 몰아 잡기도 했다. 1475년에는 선장산(仙場山)에서 왕이 사냥할 때 좌상군과 우상군 2~3만 명이 동원되었다. 또한 상군의 대장들은 종묘에 올릴 짐승을 잡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상군은 왕의 호위만이 아니라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전기에 상군이 사냥에 자주 동원되다 보니 매로 짐승을 잡는 삼패응사(三牌鷹師) 관직까지 상군에 소속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상군의 조직이 오로지 왕의 행행 대열을 전후에서 호위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전후로 구분되는 상군의 조직도, 행행 목적지로 갈 때의 선상군이 궁궐로 돌아올 때는 후상군이 되는 형식이었으므로 선상군과 후상군의 조직 구성은 별다른 특징 없이 위치에 따라 구별되는 정도였다. 다만 조선후기 군제가 5군영 체제로 운영되면서 상군도 이들 군영에서 뽑아 쓰는 모습이었다. 어느 한 군영에서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군영별로 돌아가며 상군의 군사를 뽑았고, 두 개의 군영에서 뽑은 군병이 혼합되어 조직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1733년(영조 9)에 영조가 헌릉(獻陵)에 능행을 갈 때 훈련도감과 어영청 군이 전후의 상군으로 혼성되었다. 이때 선상군은 어가가 한강을 건너기 전에 미리 건너가 나루를 시위하였고 후상군은 어가가 강을 건넌 후에 건너갔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선상군과 후상군은 어가를 전후에서 호위하는 군사로, 어가의 위치 변화와 지형에 따라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금위영거동등록(禁衛營擧動謄錄)』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온행 연구」, 『국사관논총』 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도성내 행행의 추세와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행행시 궁궐의 숙위와 유도군 연구」, 『군사』 62,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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