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上院寺)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상원사 |
한글표제 | 상원사 |
한자표제 | 上院寺 |
관련어 | 태고보우(太古普愚),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종(世宗), 세조(世祖), 원찰(願刹),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경기도 양평군 |
시대 | 고려말~조선초 |
집필자 | 한상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상원사(上院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2년 1월 24일, 『세종실록』 31년 11월 1일, 『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세조실록』 8년 10월 29일, 『세조실록』 8년 11월 5일 |
조선초기 효령대군의 원찰로, 경기도 양평군용문산에 위치한 절.
개설
고려후기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절의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12대 서원을 발원하였다. 이후 상원사(上院寺)는 관음신앙으로 유명하였다. 조선초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찰이 되었고, 세종과 세조 등 국왕이 행차하여 국가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세조는 절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영험을 경험한 후 각별하게 지원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소실되어 역사적인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변천
(1) 고려시대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후기의 『태고화상어록부록(太古和尙語錄附錄)』의 유창(維昌)이 쓴 「이웅존자시원증행장(利雄尊者諡圓證行狀)」으로, 1330년(고려 충숙왕 17) 태고보우가 상원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12대 서원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보우가 상원사에 언제부터 얼마 동안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1333년 가을부터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있었으므로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조선 건국 초인 1398년(태조 7)에는 조안(祖眼)이 중창하였다. 조안은 정지 국사 지천(智泉)의 제자로 1395년에 스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를 중창한 인물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는데 당시의 가람 규모 등은 일체 전하지 않는다.
(2) 조선시대
절의 역사는 조선초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1450년(세종 32) 왕은 정효강(鄭孝康)을 절에 보내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를 베풀게 하였다(『세종실록』 32년 1월 24일). 수륙재는 뭍과 육지의 외로운 중생을 구제하는 법회인데, 구병수륙재라고 하여 세자의 치병을 기원하였다. 세자 즉 문종이 병약하여 세종은 한 해 전에도 대자암(大慈菴)에서 약사재(藥師齋)와 수륙재를 개설한 일이 있었다(『세종실록』 31년 11월 1일). 상원사 수륙재 때 왕은 『불정심다라니(佛頂心陁難哩)』를 간행하고, 아미타경, 관음경 등을 사경하여 신하들에게 세자의 완쾌를 기원하는 독경을 권하였다.
세종과 상원사의 인연은 효령대군에게서 비롯된 듯하다. 효령은 태종의 둘째아들이므로 세종의 형이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회암사(檜巖寺), 흥천사(興天寺) 등의 중건에 기여하였고, 여러 경전의 언해·간행에 참여하였다. 조선초 왕실의 돈독한 불교신앙은 대부분 그의 영향을 받았다. 1452년(단종 즉위) 당시 효령대군의 농장(農莊)이 상원사 인근에 있었다. 이곳에서 종을 주조하여 절에 봉안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다(『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이처럼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의 주선으로 세종이 구병수륙재를 개설했던 것이다.
절과 왕실과의 인연은 세조대에도 이어졌다. 1462년(세조 8)부터 여러 차례 국왕이 절에 행차하였고(『세조실록』 8년 10월 29일), 이때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영험을 경험하였다(『세조실록』 8년 11월 5일). 이때의 정황을 최항(崔恒)이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로 남겼다. 세조는 1462년 10월에 세자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상원사를 들르게 되었는데‚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종과 북소리‚ 범패 소리가 들렸다. 막상 절에 가보니 아무도 없는데 한순간 구름이 절 위로 솟아오르며 관세음보살상이 나타났다. 주변이 온통 금색으로 변하며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리자 모두가 놀라 예배하였다. 세조가 상원사로 들어가니 담화전(曇華殿) 위에서 하얀 기운이 위로 솟아오르다가 흰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로 변하였다. 그 빛이 천지를 오랫동안 밝히다가 사라졌다. 세조가 경탄하며 향과 비단, 쌀 200석을 내리고 영의정신숙주(申叔舟)를 보내 공양하도록 하였다. 또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봉안하고, 관음의 그림을 그려서 전국에 배포하였다. 아울러 살인·강도 이외의 죄를 사면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초기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원찰(願刹)로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이후의 역사는 잘 알 수 없다. 세종과 세조 등의 호불군주(護佛君主) 이후 억불 정책이 강화되면서 더이상 왕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3) 근현대
절은 조선후기의 여러 지리서에 빠짐없이 이름이 보인다. 근대 들어 1907년 의병운동의 과정에서 전소되었고, 1918년 화송(華松)이 중건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용문산전투가 발발해 모두 소실되었다가 1969년 덕송(德松), 1970년 이후 경한(鏡漢) 등이 꾸준히 중건하였다. 가람은 대웅전과 삼성각, 용화전, 청학당 등으로 구성되었고, 효령대군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가람고(伽藍攷)』
- 『태고화상어록부록(太古和尙語錄附錄)』
-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 사찰문화연구원 편집부, 『전통사찰총서 5,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Ⅱ』, 1995.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이봉춘, 「조선초기 배불사 연구: 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