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性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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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으로서의 성(性)과 그 현실적 양태인 정(情)을 한데 이르는 말.

개설

성정(性情)은 『순자(荀子)』「정명(正命)」에서 "성(性)의 호오(好惡), 희노(喜怒), 애락(哀樂)을 정(情)이라고 한다."고 한 데에서 비롯된다. 『중용(中庸)』에서는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고, 발하여 중절(中節)된 상태를 화(和)라고 한다."고 하여 감정의 조절을 중시하였다. 송대에 와서 장재(張載)는 "형(形)이 있으면 체(體)가 있고 성이 있으면 정이 있다."고 하여 마음이 성정을 통제한다는 심통성정론(心統性論)을 제창하였고, 주희(朱熹) 역시 장재의 성정 개념을 받아들여 성은 심의 체(體), 정은 심의 용(用)이며, 성은 심의 미발(未發)이며, 정은 심의 이발(已發)로 규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과 관련하여 성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사단은 『맹자(孟子)』에서 말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표현되는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정(情)이며, 칠정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에서 말하는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을 말한다. 이러한 사단과 칠정에 관해 이황은 ‘사단을 리(理)의 발(發), 칠정을 기(氣)의 발(發)’이라고 하여 리기가 각각 발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리기가 각각 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발하며 칠정 중 선한 것이 사단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이이는 기대승의 주장에 동조하여 사단이 칠정 속에 포함되며,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가 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후 학자들은 대체로 남인의 경우 이황의 견해를, 서인의 경우 이이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내용 및 특징

성정은 타고난 본성과 감정을 뜻하는 말로 쓰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성정을 바르게 하거나 성정을 함양해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많이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사헌박경(朴經) 등은 태조이성계에게 궁중에서 밤새 풍악을 울리는 것은 성정을 기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상소하였고(『태조실록』 4년 4월 25일), 양녕대군이제(李禔)는 태종에게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면서 앞으로 사냥과 여색, 음주, 가무를 삼가고 성정을 바르게 하겠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또한 중종 때에는 어진 선비를 뽑아 조석으로 자리를 함께하여 성정을 안정하게 길러야 한다고 하거나(『중종실록』 2년 6월 10일), 홍문관에서 성정을 함양하여 마음의 위태롭고 은미한 기미를 깨달아 정밀하게 살피고 시비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중종실록』 9년 6월 22일). 이후 사림들이 득세한 이후로는 주로 함양과 관련하여 성정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사단칠정에 대해서는 헌종 때에 관학 유생들이 이황이 "사단은 리(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이이와 성혼이 왕복해 변론하여 이황의 논설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고 하였고(『헌종개수실록』 4년 5월 25일), 정조 때에는 김인후가 사단칠정에 관해 변론하여 동지들의 의심을 후련하게 풀어주었다는 사실이 거론되어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는 계기를 삼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0년 11월 8일). 이처럼 사단칠정의 이해에 관해서는 당색 간에 차이가 있었고, 조선후기 심성론의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상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
  • 陳來, 『朱子哲學硏究』, 中國: 華東師範大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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