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연(斯文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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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흥기시킨 관리를 위해 선비들이 서로 경하하며 베푼 연회.

개설

사문연(斯文宴)은 학교를 장려하고 유학을 숭상한 관리를 위해 그 지역 선비들이 마련한 잔치였다. 사문연은 특히 조선시대 개성부의 풍속으로 전한다. 유가의 기풍이 성행하도록 장려한 개성유수(開城留守)에게 선비들이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풍악을 베풀어 서로 경하하였다. 그러나 백성에게까지 과도한 부담이 전가되면서 한때 조정의 규제로 중지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사문(斯文)은 유학의 도의나 문화, 혹은 유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논어』 「자한」 편에, “하늘이 이 성인의 도[斯文]를 없애지 않으시니,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리오![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는 문구에서 비롯된 ‘사문’은 후대에 유학 혹은 유학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사문연은 유학의 도를 드높인 사람에게 뜻을 함께하는 선비들이 자체적으로 경비를 마련하여 베풀어준 연회였다. 흥미로운 점은 사문연과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 개성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성에서는 유학을 숭상하는 관리에게 선비들이 사문연을 베풀어서 스스로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었던 전례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1579년(선조 12)에 윤근수(尹根壽)가 개성유수로 제수되어 상업 위주의 개성을 유가의 기풍이 성행하도록 바꾸었다고 하여 개성의 많은 선비들이 사문연을 베풀어 서로 경하하였다고 한다. 또 1672년(현종 13)에 이후산(李後山)이 개성유수로 제수되었을 때도 학교를 숭상한 그의 업적을 기려 사문연을 베풀려고 준비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사문연은 잔치를 주관하는 선비들이 민간인에게 과도한 경비를 부담시키는 폐단도 낳았다. 1664년(현종 5)에는 개성부 사인(士人) 조석(曺錫) 등 10여 인이 사문연이라는 명목으로 유생들 수백 인에게 돈과 물화를 거두어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풍악을 베풀었는데, 이때 민간에 과도한 부담을 주어 개성부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집을 옮기는 일까지 발생하였다(『현종실록』 5년 10월 26일). 사문연이 본 취지에서 벗어나 백성에게까지 과도한 재정과 인력 부담을 주는 폐단을 가져온 것이다.

변천

사문연과 관련된 기록이 워낙 영성하고 남아있는 자료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친 짧은 시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문연의 변천을 살펴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개성에서는 한동안 사문연이 미풍의 전례였으나 차츰 민간에 피해를 주는 폐단을 일으키면서 1664년 이후 조정의 규제로 한동안 폐지되었다(『현종실록』 5년 10월 26일).

참고문헌

  • 『논어(論語)』
  • 『상촌집(象村集)』
  • 『청음집(淸陰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