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사(瑞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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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광교산에 있었던 절.

개설

서봉사(瑞峰寺)의 창건 시기는 전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인 12세기에 현오(玄悟) 국사(國師) 종린(宗璘)이 주석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천태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지만 19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서봉사지(瑞峰寺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있고, 2013년부터 용인시가 학술 발굴 조사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고려 때 현오 국사 종린이 주석하면서 국왕을 강학(講學)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고려후기에 세워진 현오국사탑비(玄悟國師塔碑) 등을 볼 때 고려시대의 절로 추정되고 있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용구(龍駒: 현 경기도 용인) 서봉사가 천태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서봉사는 천태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된 사찰이었으므로, 당시 서봉사가 용구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현존하는 사찰로 명기된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까지 계속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반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폐사된 절로 명기된 것으로 보아 19세기경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현대

현재는 절터만 전하는데, 서봉사 터는 자연 경사면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6단의 석축 계단을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한 산지가람 형태이다. 절터의 전체 남북 길이는 130m, 동서 폭은 90m이다.

2009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사역 지표 조사를 통해 서봉사지가 크게 중원, 동원, 서원의 세 영역으로 나눠진 것을 확인했으며, 수원시는 이를 바탕으로 2012년 종합 정비 계획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2013년 용인시가 한백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서봉사지에 대한 1차 학술 발굴 조사를 한 결과, 현오국사탑비가 있는 중원에서 확인된 금당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동서 14.8m~16.5m, 남북 10.5m~10.7m 크기로, 처음 지은 뒤 크게 3차례에 걸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건물은 기단과 초석 및 적심 그리고 초석 사이에 조성된 하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금당지 서쪽편에서도 건물지 2동이 일부 확인되었으며, 이 건물지의 북편에 축대가 시설되어 있었다. 금당지 내부와 기단 주변에서는 막새기와를 비롯해 다량의 평기와가 출토되었다.

문화재

서봉사 현오국사탑비(瑞峰寺 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호)는 1185년(고려 명종 1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이지명이 지었고 글씨는 유공권이 썼다. 높이 1.88m, 너비 0.97m인 점판암의 탑신이 화강암의 부석(趺石) 위에 있으며 이수(螭首)는 없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범우고(梵宇攷)』
  •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