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白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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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토와 백자 유약으로 번조한 백색 자기.

개설

백자(白磁)는 백자유와 백자토를 사용하여 번조한 자기이다. 일반적으로는 1,200~1,300도에서 구워낸다. 백자는 사용된 태토(胎土)와 유약의 성분에 따라 백색도를 달리할 수 있으며 환원염(還元焰)으로 했을 때 백색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도토(陶土) 산지에서 오래전부터 질 좋은 원료를 굴취하여 사용해왔으며, 대표적으로 양구·광주·진주·곤양 등이 우수한 지역에 속했다. 이들 산지는 영조 연간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으며, 특히 광주와 곤양은 우수한 유약 원료 산지로 표기되었다.

백자가 주요 공예품으로 생산되던 조선시대에는 안정적이면서 품질이 우수한 양질의 백자를 얻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관요를 설치하고 체계적인 생산에 돌입했다. 이때 사용된 원료들은 엄선된 것들이며 여러 실험 과정을 거친 것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사용된 백유(白釉)는 중국이나 일본의 것에 비해 철 함량이 높아 백색도가 높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전 시기에 걸쳐 백자를 제작했다. 초기에는 고려의 청자와 분청사기 등과 더불어 순백자가 제작되었고, 점차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청화백자 생산이 활발해졌다. 조선중기에는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戰亂)으로 한동안 철화백자가 유행하였으며, 국정이 안정되는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다시 청화백자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된 1945년까지도 백자는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백자가 체계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때는 사옹원(司饔院) 소속의 관요인 분원이 설치되면서부터이다. 분원은 경기도 광주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1884년(고종 21)까지 관영으로 운영되다가, 이후 민영화되어 20세기 초까지 운영되었다.

분원이 설치된 시기는 여러 학자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1467년(세조 13)에 “사옹방(司饔房)을 고쳐서 사옹원이라 하고 비로소 녹관을 두었다.”고 한 기록으로 볼 때 이 시기의 분원 설립설이 지배적이다(『세조실록』 13년 4월 4일). 이 무렵 사옹원은 조직과 업무를 새롭게 체계화하고, 관요를 설치한 이후에는 사옹원 관리를 파견하여 왕실에서 사용하는 자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였다. 한편 조선 요업의 중심지였던 분원의 운영에 따라 지방요도 영향을 받았다. 지방 백자 가운데 분원 백자를 추종하는 양식과 가마 구조의 유사성이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백자 생산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의 공예품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공산품(工産品)으로서 자리매김하였고, 그 영향이 일본으로 전해져 자기 생산에 크게 기여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백자는 유백색, 청색, 회백색 등 다양한 색깔을 띠었다. 유형도 순백자, 양각백자, 음각백자, 투각백자, 상형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 매우 다양하였다. 특히 청화백자는 초벌한 백자 위에 회청(回靑)이라는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후에 번조한 것이다.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회청 안료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중국 등지로부터 고가에 수입하였다. 청화백자의 제작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청화자기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이들 대부분은 15세기 전반에 중국 사신들을 통하여 유입된 것들로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15세기 중반 전후로 보고 있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456년(명 경태 7)에 제작된 명나라의 ‘청화백자인천이씨묘지석(靑畵白磁仁川李氏墓誌石)’을 들 수 있는데 청화의 발색이나 번조가 우수한 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백자는 다양한 안료와 기법으로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다채롭게 제작되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중기·후기·말기에 따라 생산 유형을 달리했는데, 이는 당대인들의 취향과 풍습, 상공업의 발달, 국가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령 1489년(성종 20)에 제작된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화백자홍치이년명매죽문호(靑畵白磁弘治二年銘梅竹文壺)’의 경우 분원 초기에 사옹원에서 파견한 화원의 필치를 느끼게 하는 최상급 청화백자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개인 소장의 ‘철화백자운룡문호(鐵畵白磁雲龍文壺)’는 전란과 더불어 대유행한 철화백자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제작된 ‘청화백자매화화분문호(靑畵白磁梅花花盆文壺)’는 청화백자가 대중화되고 풍류와 여기문화를 즐기던 조선후기의 사회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변천

우리나라에서 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전기부터이다. 대략적으로 10세기 이후부터 백자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전 시대부터 중국에서 각종 백자가 유입되어 그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백자는 이미 초기 청자 시기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경기도 용인 서리에 있는 요지 퇴적층에서 해무리굽 백자완과 청자 등이 동반 출토된 사실로 알 수 있다. 이 가마는 12세기 전반까지 지속적으로 운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부안 유천리요 등에서는 고려후기까지도 백자의 생산이 계속되었다.

고려시대 백자는 품질 면에서는 조선시대 백자와 큰 차이가 있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자기는 청자였고, 백자는 청자에 비해 생산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청자를 추종하거나 공유하는 경향이 높았으며, 상아색을 띤 연질백자(軟質白磁)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고려 백자는 청자에 비해 기술적으로나 질적으로 뛰어나지 못하였다.

이후 조선이 개국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고려시대의 최고 공예품이던 청자의 시대가 가고 백자와 분청사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명대 청화백자의 영향으로 최초로 경질백자(硬質白磁)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경질백자 제작은 정확한 시기를 가늠할 수 없지만 세종대에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하고 황제가 하사한 그릇들을 전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의 자기를 요구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이미 백자가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5년 8월 28일). 특히 조선초기에 명나라의 사신이 황제에게 바칠 진헌품으로 조선백자를 요구하여 이를 위해 대·중·소의 백자 장본을 정세하게 구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세종실록』 7년 2월 15일). 이로 인해 당시 광주 일대에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세련된 수준의 백자들이 생산되었으며, 중국에 대한 진헌품으로서도 손색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자의 양식은 시기적인 변화를 보였다. 즉 시기에 따라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이 집중 생산되어 왕실은 물론 관료, 종친, 상류층 등 각계각층에 공급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순백자와 청화백자 생산량이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15세기에는 중국 명대 청화백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데, 이는 『세종실록』「오례」에 보이는 의기(儀器) 대부분이 중국과 유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후 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더 이상 청화백자 생산이 어려워지자 철화백자가 크게 유행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전란을 극복한 18세기에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면서 청화백자 생산이 다시 활발해졌다. 또한 분원이 민영화된 1884년(고종 21) 이후에도 백자는 계속해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분원이 민영으로 전환되자 백자는 이전과 달리 상업성을 띤 그릇 위주로 제작되었으며 예전 분원의 위상은 거의 상실되다시피 했다. 19세기 말엽에 기존의 분원공소는 분원번자회사(分院燔磁會社)로 거듭났지만 일제 강점을 앞두고 이조차 경영이 순탄하지 못해 완전히 폐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적인 양식과 왜색적인 양식이 혼합된 백자들이 생산되어 조선백자 고유의 정체성이 거의 상실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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