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北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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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뒤쪽에 있는, 도성의 주산(主山)으로 여겨지던 산.

개설

한국과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국토의 방위에 따라 오방신(五方神)을 두고 방위선 상의 높은 산을 오악(五嶽)으로 삼고 그 중 북쪽의 산을 북악(北岳)이라고 하였다. 북악은 고려시대에 면악(面岳)이라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 북악은 국가의 중요한 제사 장소였으며, 신성한 기운이 깃든 장소로 숭배되었다.

조선을 건국할 때 태조는 도성과 왕궁을 건설하기 전에 산천의 신에게 올리는 고유문에서 북악을 명산대천이라고 하고 신령이 깃든 산이라고 하였다. 또한 상시로 제사 지내는 것을 법전에 등록하겠다고 하며 왕조의 안녕을 빌었다(『태조실록』 3년 12월 3일). 태조는 조선 건국 때부터 북악산을 신성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태조는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南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국가에서만 제사를 지내고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는 장소로 만들었다(『태조실록』 4년 12월 29일). 세종대에는 공용(公用)이라고 할지라도 백악에서 돌을 채취하는 것을 금지하였다(『세종실록』 13년 3월 19일). 세조대에는 암자나 산속에서 기도를 올리던 승려들을 모두 퇴거시켰다(『세조실록』 7년 5월 1일).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부터 북악은 나라에서 숭상하는 산이면서 명당지(明堂地)로 인식되었다. 조선전기의 도성 내 정궁(正宮)이며 법궁인 경복궁의 자리가 명당인 것은 주산인 북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29일). 한양 도성 주변의 사산(四山)인 북쪽의 북악, 서쪽의 인왕산(仁旺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동쪽의 낙산(駱山) 중에서 북악이 주산이었다(『정조실록』 2년 7월 20일). 북악이 명당으로 인식됨으로써 조선전기부터 기우제를 비롯한 국가 제사가 거행되었다. 국가 제사는 조선초기부터 진행되었다. 태종은 1406년(태종 6)에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하면서 무당을 모아 백악산에서도 비 내리기를 기도하게 하였다(『태종실록』 6년 7월 25일). 또한 기청제(祈晴祭)도 동일하게 거행하였다(『명종실록』 9년 6월 12일).

변천

중종대에 명나라 사신들이 왔을 때 도성의 풍수를 논하면서 공극산(拱極山)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때 인왕산은 필운대로 명명하였다(『중종실록』 32년 3월 14일).

조선후기까지 풍수 사상이 이어져서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계속 이용되었다(『영조실록』 29년 5월 15일). 고종대에는 훈련도감에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보호한 산이었다(『고종실록』 5년 9월 20일).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와 총독의 관저가 백악산의 전면에 위치하여 일반인들의 거주가 어려워 도성에서 신성시하던 관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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