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조(燔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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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안에 불을 때서 자기를 굽는 것.

개설

번조(燔造)는 도자기를 만드는 여러 과정 중에서 가마[窯] 안에 그릇을 넣어 불에 굽는 단계이다. 이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특히 관요(官窯)에서 백자를 ‘굽다’ 또는 ‘구워서 만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왕실용 진상 자기와 관서에서 사용한 공용 자기는 주로 분청사기(粉靑沙器)였다. 이들 자기는 여러 지방에서 각 지방관의 책임 아래 현물세(現物稅)인 공물(貢物)로 제작되어 중앙의 사용처로 상납되었다. 세종 연간과 세조 연간을 거치며 공납 자기의 종류가 백자로 변하였고, 조선 정부는 1467~1469년에 경기도 광주에 백자의 제작을 전담할 관요를 설치하였다. 이후 이조(吏曹)에 속한 사옹원(司饔院)의 관리들이 백자의 제작을 직접 담당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백자의 제작과 관련된 용어인 번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번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자기를 굽는 것 외에 유리구슬을 의미하는 청주(靑珠)·주옥(珠玉)·수정(水精) 등을 만들거나 장사(葬事)를 치를 때 관(棺)을 밀봉하는 데 쓰인 석회(石灰)를 가공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세조대에는 왕실용으로 진상하기 위한 것과 이미 제작된 것을 제외하고 공적이거나 사사로운 목적으로 백자를 번조하는 것을 금지하였다(『세조실록』 12년 6월 7일). 궁궐 안에 있는 대전, 중궁전, 세자전의 일상용 그릇과 왕실의 혼전(魂殿)인 문소전(文昭殿)의 제기는 금속기인 은기(銀器)였다. 세조는 은기를 백자와 청자로 바꾸고 이들 자기를 생산하기 위한 사기소(沙器所)인 관요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백자 번조 금지령은 백토(白土)가 나는 곳에 대한 조사와 함께 그 첫 번째 단계의 조치였다.

관요의 설치는 1467년(세조 13)에 왕실의 식사와 궁궐에서 열리는 연회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서인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으로 확대되어 관리[祿官]가 배치되었고, 이어 1469년(예종 1)에 여러 지방의 사기장(沙器匠) 중에서 발탁된 380명이 『경국대전(經國大典)』「공전(工典)」에 사옹원 소속으로 등록됨으로써 완료되었다. 이후 사옹원에서 백자를 제작하는 실제 업무는 ‘사기번조관(沙器燔造官)’이라고도 불린 번조관(燔造官)이 담당하였다. 이는 사기번조관으로 등장하는 사옹원 봉사한세명(韓世鳴)(『중종실록』 35년 5월 11일), 사옹원 직장(直長)으로 사기 제작을 감독한 정매신(鄭梅臣)의 분원 번조봉사(燔造奉事)의 예에서 알 수 있다(『고종실록』 19년 12월 29일). 사기번조관은 종7품 직장, 종8품 봉사가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사옹원 봉사, 분원 낭청, 감관이라고도 불렸다.

관요에서의 백자 번조는 일 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이루어졌다. 이는 1645년(인조 23)에 사옹원이 제조(提調)들이 나누어 가질 그릇을 공용의 그릇과 대등하게 만드느라 지나치게 많은 양의 자기를 번조한 것에 대해 이조의 관리가 문제를 제기하고 규정대로 바로잡을 것을 건의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인조실록』 23년 5월 28일).

사옹원의 자기 번조에 필요한 땔나무를 베어내는 장소는 시장(柴場) 또는 시산(柴山)이라고 하였다(『영조실록』 1년 4월 8일). 사옹원 사기소의 시장은 일정한 곳 없이 땔나무가 무성한 곳을 따라 옮겨 다녔다(『성종실록』 24년 5월 25일). 숙종대에는 번소(燔所)를 양근군의 우천강 가로 옮기며 사옹원 본원의 시장을 분원에 소속시켰다(『숙종실록』 44년 8월 19일).

참고문헌

  • 방병선,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전승창, 「京畿道 廣州 官窯의 設置時期와 燔造官」, 『미술사연구』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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