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골승(埋骨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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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장례 의식에서 시신을 땅에 묻고 명복을 비는 역할을 담당한 승려.

개설

승려의 기본 임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일과, 중생을 번민과 고통에서 구제하는 일이다. 매골승(埋骨僧)의 역할 즉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명복을 비는 일은 그 중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일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의 매골승은 의료 시설에 소속되어 시신을 매장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급료와 기본적인 혜택을 받았다. 그에 따라 특정한 소임이 있는 유직승(有職僧)으로 분류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승려는 대부분 국가에서 시행하는 토목 공사 등 각종 부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특정한 소임을 맡은 승려는 일반 승려와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1432년(세종 14)에 조정에서는 군역(軍役)을 피하려는 승려를 단속하면서, 소임이 없는 승려는 죄를 논하여 군역에 동원하였다. 그에 비해 시신을 넣는 관곽(棺槨)을 판매하고 예장(禮葬)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던 귀후소(歸厚所)의 매골승이나 주자소(鑄字所)에서 글자를 새기는 승려, 동활인원(東活人院)과 서활인원에서 한증(汗蒸)을 담당한 승려 등 일정한 소임이 있는 승려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27년(세종 9)에는 예조와 한성부의 요청에 따라, 도성 안의 매골승 수를 늘려 두 활인원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이때 예조와 한성부에서 올린 「매골승권려사목(埋骨僧勸勵事目)」에 따르면, 기존에 10명이던 정원을 6명 더 늘려 동서활인원에 각각 8명씩 배치한 다음, 한성부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설치한 다섯 관서인 오부(五部)와 도성 밖 10리(里)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그 대가로 월급과 소금·장을 주고,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각기 면포 1필씩을 주었다. 또한 활인원의 관원이 매골승의 근실함과 태만함을 살펴, 매장을 가장 많이 한 승려 1명에게 매년 관직을 주었다. (『세종실록』 9년 9월 1일).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428년(세종 10)에 예조에서 두 활인원의 매골승이 총 8명뿐이어서 시신을 거두어 묻기가 어려우므로 2명씩 늘려 줄 것을 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매골승에 대한 대우는 더욱 좋아졌다. 1437년(세종 19)에는 선종과 교종에 속한 각 사찰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량 8,095결에서 140결을 활인원에, 70결을 귀후소에 나누어 주어 매골승의 처우를 향상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도성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질병 등으로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데 승려를 동원하였다. 1423년(세종 5) 5월에 순안현의 관리가, 질병으로 횡사하는 자가 많아 매장이 쉽지 않으므로 도성의 예에 따라 매골승을 동원해 뼈를 수습하고 매장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그밖에 황해도에서는 승려들로 하여금 유골을 수습하여 태우고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게 하였다. 1445년(세종 27)에 제주도에서는 나병(癩病)이 유행하여 환자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이때 특사로 파견된 안무사는 승려를 불러 뼈를 수습해 매장하도록 한 뒤, 각 읍의 승려 1명을 군역에서 면제시켜 주고 의생과 함께 치료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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