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본억말(務本抑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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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을 권장하고 상업을 억제한다는 뜻으로, 조선전기의 경제정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

개설

고려말의 혼란과 폐단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세워진 조선왕조는 기본적인 경제정책 방향을 농업의 진흥에 두고 상업을 억제하였다. 이는 재화를 생산하는 본업(本業)을 농업에 두고, 나머지 공업과 상업을 말업(末業)으로 상정한 것을 뜻하였다. 그에 따라 각각의 생산 담당자인 농민과 공상(工商)을 상하·귀천의 관계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억말정책은 말 그대로 상업을 억압하는 정책은 아니었다. 상업이나 공업도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지만, 이들이 너무 발전하면 농업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일정한 정도 이상의 발전은 제한하는 것이 무본억말정책이었다.

내용 및 특징

무본억말을 위해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상업의 필수 불가결한 측면을 인정하되, 이를 국가에서 장악하여 상업에 간여하고 조정하려고 하였다. 정부가 재정 운영의 일환으로 상업을 직접 운영하거나, 아니면 관리 통제하는 정책이 그것이었다. 재정 보충과 민생을 위한 재분배정책으로 실시된 납곡(納穀), 관에서 주도하는 곡식 무역, 관염(官鹽)의 확보와 교역 등이 예였다.

또 다른 측면은 농업 인구가 감소되고 그 결과 농업 기반이 축소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일반 백성들이 상인으로 전업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상업에 종사할 사람을 지정·육성하여 이들에게 상업을 전담하게 하고, 그 활동을 국가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전상인과 지방에서 활동하던 행상은 모두 국가가 허용하고 또 장악·통제한 상인이었다. 이들 전업 상인 이외의 일반 백성, 특히 농민은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또 상인이나 수공업자의 후손들은 관직 진출을 막기도 하였다. 이는 농민들이 상인이나 수공업자로 전업하여, 농업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를 통해 상업을 농업생산력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유지시키고, 농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국가경제를 건실히 하고자 하였다.

변천

정부의 억말책에도 불구하고 상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지주경제 및 소농(小農)경제 모두 상업과의 연관은 더욱 밀접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15세기 중반 이후에 시작되고 16세기에 들어서면 더욱 구체화되었다. 서울에서는 시전이 확대·발전하는 것과 비례해 비시전계 상인들도 성장하였다. 지방에서는 장시가 점차 확산되면서 일반화되는 양상을 띠고, 선상의 활발한 활동에 기반하여 서울 중심의 상품교역망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업의 발전에 호응하여 정부의 정책관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농업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념을 무본보말(務本補末)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재정 실무를 담당하던 관료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사고가 증폭되었다. 이후 무본보말론(務本補末論)은 19세기 말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상업입국론(商業立國論)으로 변화되기 이전까지 조선의 경제정책을 입안하는 데 기본 방략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 김용섭, 『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상)』, 일조각, 1984.
  • 박평식, 『조선전기 상업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 백승철, 『조선후기 상업사연구』, 혜안,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