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도(無逸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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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의 내용을 전거로 한 그림이나 글씨.

개설

『서경』 「무일편」은 주나라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왕의 자세에 대해 충고한 글이다. 주공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왕이 백성들의 일상인 농상(農桑)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할 것을 조언하고, 이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예로 선대왕의 행적을 설명하였다. 이 내용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린 것이 무일도(無逸圖)이다. 무일도는 조선 왕실에서 빈풍도(豳風圖)와 함께 왕이 반드시 알고 실천해야 할 기본 도리를 일깨우는 시각적 표상으로 간주되어 왕이 즉위할 때나 탄일에 신하들이 선물로 바쳤으며, 왕이 항상 가까이에 두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무일도는 그림, 글씨, 도식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 중 그림은 현재 전하는 것이 없어 어떠한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기록을 통해 그 내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김양경(金良鏡)은 대관전(大觀殿)의 어좌(御座) 뒤 무일도 장자(障子)에 쓴 시 「서대관전보좌후장무일도상(書大觀殿黼座後障無逸圖上)」에서, “노가 무거우니 노마의 달림이 더디고/ 하늘이 높아서 학의 그리움이 길다/ 헌 옷을 몇 번이나 빨았던고/ 오히려 어로의 향로를 머금었네/ 동산의 꽃은 붉은 비단이요/ 궁전의 버들은 푸른 실마리어라/ 목청이며 혀 굴리기 천 가지 재주에/ 봄 꾀꼬리가 도리어 사람보다 낫구나[輅重駑馳短/天高鶴戀長/舊衣經幾濯/猶帶御爐香/園花紅錦繡/宮柳碧絲綸/喉舌千般巧/春鶯却勝人]”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무일도에는 동산에 붉은 꽃이 만발하고 푸른 버들이 늘어져 있으며, 봄 꾀꼬리가 우는 아름다운 풍경의 궁궐에서 헌옷 차림의 검소한 왕이 수레를 타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무일도 그림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태종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풍해도도절제사(豐海道都節制使)유은지(柳殷之)가 무일도 그림을 올렸다는 기사이지만 그림의 내용은 알 수 없다(『태종실록』 10년 5월 16일).

한편 무일도가 글씨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주 발견된다. 1103년(고려 숙종 8) 숙종이 직사관(直史館)홍관(洪灌)으로 하여금 회경전(會慶殿)의 병풍에 「무일편」을 쓰도록 지시한 바 있으며, 1206년(고려 희종 2)에는 선경전(宣慶殿)과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편전인 대관전의 옥좌 뒤 병풍이 더러워져 최우(崔瑀)로 하여금 『서경』의 「홍범편(洪範篇)」과 「무일편」을 다시 쓰게 한 뒤 중국 사신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1244년(고려 고종 31)에는 최이(崔怡)가 강안전(康安殿) 후벽에 있는 장자(障子)의 전체 폭을 누런 비단으로 장식하고 최항(崔沆)을 시켜 「무일편」을 쓰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서경』「무일편」은 경연(經筵)에서 강학의 자료로 사용되면서 왕실 내에서 매우 중요한 편명으로 여겨졌으며 주로 글씨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 실례로 보은 법주사에 소장된 「주서무일편병풍(周書無逸篇屛風)」은 1758년(영조 34)에 영조가 「선조대왕어필병풍(先朝大王御筆屛風)」,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과 함께 하사한 것으로 전하는데, 「주서무일편병풍」은 나머지 두 건의 병풍과 지질이나 표구 방법 등이 유사하여 궁중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밖에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무일편서병(無逸篇書屛)」이 전한다.

이 밖에 도식으로 표현된 무일도가 전하는데, 1390년 권근(權近)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은 「무일편」의 내용을 알기 쉽게 도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무일도는 그림, 글씨, 도식 등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변천

중국에서 비롯된 무일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22년 북송의 학사였던 손석(孫奭)이 인종에게 무일도를 그려 바친 것을 인종이 강독각(講讀閣)에 걸어두게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일도에 대한 기록은 일찍이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보인다. 즉 제10조의 내용을 보면, “국가를 유지하려면 근심이 없을 때를 경계해야 할 것이니, 경서와 사기를 널리 보아서 옛 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라. 주공 같은 대성(大聖)은 『서경』의 「무일」 1편을 성왕에게 올려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걸어두고 드나들며 살펴보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고려 태조의 유지는 고려 후대의 왕들에게 영향을 주어,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일도를 회경전, 선경전, 대관전 등 궁궐의 주요 전각에 걸어두고 가까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는 조정의 신하들이나 지방 관리들이 왕의 등극 또는 탄신을 축하하는 선물로 무일도를 바친 경우가 많다. 1399년(정종 1) 1월 우도감사최유경(崔有慶)이 정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선물로 무일도를 바쳤으며(『정종실록』 1년 1월 1일), 1410년(태종 10)에는 풍해도절도사유은지가 태종의 탄신을 축하하는 선물로 무일도 족자 1본을 바쳤다(『태종실록』 10년 5월 16일). 또 1549년(명종 4) 하성위(河城尉)정현조(鄭顯祖)가 무일도 병풍을 명종에게 바쳤는데, 무일도 병풍 서두에 “어찌 꼭 성왕만이 알아야 할 것인가? 실로 천하 만세 군주의 귀감인 것이다.”라는 글귀를 적었다고 한다(『명종실록』 4년 12월 5일).

이러한 무일도의 제작 사례는 궁중에서 제작되는 무일 정신을 반영한 또 다른 시각 자료인 경직도(耕織圖)의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급감하였다. 그러나 『서경』「무일편」은 왕실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진 경연과 서연의 교재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문선(東文選)』
  • 박정혜 외, 『왕과 국가의 회화』, 돌베개, 2011.
  • 정병모, 『한국의 풍속화』, 한길아트, 1998.
  • 김영욱, 「조선시대 왕실 감계화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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