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쟁송(奴婢爭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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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의 소유권 등을 놓고 분쟁 당사자 간에 벌이는 법적 분쟁.

개설

노비쟁송(奴婢爭訟)은 조선시대에 발생한 재산 분쟁의 하나로, 줄여서 노비송(奴婢訟)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와 달리 분쟁의 대상물이 토지인 경우는 전답송(田畓訟)이라 하며, 노비송과 전답송을 합쳐 전민송(田民訟)이라고도 한다. 이는 토지와 노비를 합쳐 전민(田民)이라고 지칭하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비는 조선시대 양반의 재산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고, 사사롭게 매매되었다. 노비 상속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하거나, 매매로 인한 각종 분쟁이 빈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노비는 천인(賤人)이지만 양인과의 혼인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이러한 양천교혼(良賤交婚)으로 인한 노비 자신과 그 소생의 신분 귀속 분쟁 등 쟁송의 내용은 매우 다양했다.

노비쟁송에 대해서는 주로 조선초기 『조선왕조실록』에 그 사례와 조정 대신들의 논의 과정, 그리고 판결 내용 등이 여러 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성종대가 지나면 실록에서 노비쟁송의 사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다행히 16세기 이후 노비쟁송은 고문서 자료가 몇 건 남아 있어 쟁송의 내용뿐 아니라 처리 절차, 쟁송에 담긴 당시인들의 관습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노비쟁송은 조선초기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이유는 조선을 건국한 세력이 토지의 경우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는 등 정비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데에 비해 노비에 관해서는 건국 당시 제도를 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왕조 때의 노비가 건국 초의 사회 혼란기를 틈타 양인화하는가 하면, 반대로 권력을 이용하여 양적(良籍)이 미비한 양인을 자신의 노비로 만드는 이가 생기는 등 혼란이 발생하였다.

또 조선초기 처첩분변(妻妾分辨)이 사회의 당면 과제로 부각되면서 첩과 그 소생의 지위, 그들에 대한 재산 상속과 관련한 소송도 더해졌다. 첩과 그 소생에는 상당수 천인 신분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첩분변과 그 결과는 다양한 노비쟁송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초기의 노비쟁송 사례는 초기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다.

특히 조선초기의 노비쟁송에서 재산 상속이나 가문 내의 신분 갈등, 풍속 및 윤리 등과 연관된 사례가 많아지자 이들 쟁송의 처리 지침을 놓고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노비중분결절법(奴婢中分決折法)’을 내놓아 쟁송에 관여된 노비를 쟁송의 당사자가 동등하게 나누도록 하는 지침을 선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중분결절법은 조선초기 실록에서만 발견될 뿐 그 이후 실록은 물론 각종 법전류, 그리고 쟁송 관련 고문서에서 전혀 찾아지지 않고 있다. 이는 중분(中分)을 통해 노비쟁송을 판결하려던 조정의 방침이 정착·실현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초기의 혼란기가 지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의 정착으로 사회가 안정되는 16세기가 되면 상속 분쟁의 하나로 양반 가문들 간에 노비쟁송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16세기의 친족 간 노비쟁송은 당시의 쟁송 과정이나 판결 내용 등을 모두 수록한 결송입안(決訟立案)이 여러 건 남아 있어 쟁송의 실제 과정과 판결 내용 및 법리(法理), 당시 사람들의 노비 및 친족제에 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16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혈족을 우선한 판결이, 그 이후에는 제사를 승계하는 아들 위주의 판결이 내려진 점은 매우 주목할 가치가 있다. 즉 노비쟁송의 판결은 가족관과 가족 의식의 변천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자식 없이 죽은 양반가 여성의 재산을 놓고 벌어지는 소송에서, 16세기 중반 이전에는 친정으로의 재산 환수 판결이, 중반 이후에는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받드는 의자녀(義子女)에게 귀속하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전 양반가는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비의 상당수는 주가(主家)와 주거를 함께 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앙역노비(仰役奴婢)가 아니라 상전에게 일정한 신공(身貢)만 납부하는 납공노비(納貢奴婢)였다. 따라서 경상도의 양반이 전라도·충청도뿐 아니라 황해도·함경도 소재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일례로 1494년(성종 25) 경상도 영해의 재령이씨(載寧李氏) 종가는 758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이들 노비는 8도 72개 군현에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전국에 노비가 분포하고 있다면 이들 중 대부분이 납공노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 양반들이 노비 관리 능력을 상실하면서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반들은 피난하기에 급급했고, 특히 먼 지역에 떨어져 있는 노비의 경우 도망하여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도망한 노비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다른 곳에 스스로를 의탁하기도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양적을 얻어 양인으로서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후기에는 도망 노비를 추적하여 찾으려는 양반과, 새 주인이 된 다른 양반 사이의 노비쟁송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활발한 노비 거래로 인한 이중 방매(放賣) 분쟁과, 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각종 문적을 위조하여 야기된 위조 문기 분쟁에 이르기까지 쟁송의 원인뿐 아니라 과정도 복잡해졌다.

18세기 이후에는 노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양반 간의 쟁송뿐 아니라 노비와 주인 사이의 쟁송도 발생했다. 이는 양반을 상대로 쟁송을 벌일 만큼 사회경제적 지위가 신장된 노비가 생겼다는 의미와, 양반 중에 노비에 의해 쟁송의 대상이 될 만큼 힘이 미약해진 이가 생겼다는 양면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노비쟁송의 원인이나 유형, 그 판결 내용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추세였다.

변천

노비쟁송은 시기에 따라 그 유형이 여러 가지로 변화하였다. 조선전기에는 노비 상속의 결과를 놓고 친인척 간에 벌어지는 상속 분쟁이 많은 편이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노비의 이중 방매로 인한 소유권 분쟁, 양천교혼으로 인한 그 소생의 신분 규정을 놓고 벌어지는 분쟁, 노비의 도망이나 의탁 등으로 인한 소유권 분쟁 등 그 유형이 다양해졌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강한 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노비의 불리한 지위가 다소 해소되어 노비와 주인 사이의 분쟁도 많이 발생하였다. 즉 노비와 주인 사이의 신분적 구속력이 이완된 틈을 타 노비들이 양인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주인을 고발하는 등 분쟁의 형태가 다양해진 것이다. 쟁송의 결과 역시 항상 일관되지는 않았다. 양측이 동원하는 증거 문서나 증인들의 증언 내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고, 법리의 해석 역시 송관(訟官)에 따라 혹은 시대정신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의의

노비쟁송은 시기별 쟁송의 사례, 이에 대한 판결, 각종 법리의 해석, 쟁송에 나타난 당사자의 인식 등 모든 분야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컨대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상속 분쟁에서 신분 분쟁으로 분쟁 양상이 변화하는 것은 노비가 쟁송의 객체로부터 주체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여 준다. 또 상속 분쟁에서 혈족 위주의 판결로부터 성리학적 의리·명분 위주의 판결로 변화하는 모습은 조선시대 친족제의 흐름과 맥락을 함께 한다. 이와 같이 노비 쟁송의 유형 및 결과의 변천 과정은 조선시대 노비의 존재 양태를 포함한 각종 사회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박병호, 『한국법제사고 -근세의 법과 사회-』, 법문사, 1974.
  • 조윤선, 『조선후기 소송 연구』, 국학자료원, 2002.
  • 김경숙, 「18세기 후반 노비쟁송의 사례분석 -풍산유씨 고문서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8, 1996.
  • 문숙자, 「조선전기 무자녀망처(無子女亡妻) 재산의 상속을 둘러싼 소송사례」, 『고문서연구』5, 1993.
  • 연정열, 「조선초기 노비쟁송에 관한 연구」, 『노동경제논집』,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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