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암(大慈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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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무덤 곁에 창건한 원당.

개설

대자암(大慈庵)은 태종이 성녕대군 사후 대군의 무덤 옆에 창건한 원찰이다. 성녕대군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북산에 있다. 세종과 문종대를 거치면서 성녕대군뿐만 아니라 태종과 원경왕후, 세종과 소헌왕후 및 문종의 칠칠재와 소상 혹은 대상 불사를 설행하는 장소가 되어 대표적인 왕실원당이 되었다. 그러나 단종 이후 대자암의 사세는 점차 위축되었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 세종대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선종 18사 중 하나가 되었다.

내용 및 변천

대자암은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이 죽은 뒤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 곁에 창건한 왕실원찰이다. 1418년(태종 18) 2월 4일 성녕대군이 병으로 사망하자 경기도 고양현 산리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 곁에 암자를 짓고 대자암이라 하고 노비 20구와 전지 50결을 주었다(『태종실록』 18년 4월 4일). 윤회(尹淮)의 「만덕산백련사중창기(萬德山白蓮社重創記)」에 의하면 대자암을 창건하고 행호(行乎)를 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대자암은 세종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왕실원찰로 자리 잡았다. 1419년(세종 1) 감로사(甘露寺)의 노비 100명을 대자암에 주었으나(『세종실록』 1년 2월 22일), 같은 해 12월 원경왕후(元敬王后) 선대에 시주한 것이라 하여 대자암의 노비를 수강궁(壽康宮)에 이속시켰다(『세종실록』 1년 12월 4일). 그러나 대자암에 전지 지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처음 50결로 시작된 대자암의 전지는 1424년(세종 6)에 152결 96복으로 늘어났다.

대자암은 세종대 왕실의 병환을 해결을 기도하는 구병법석(救病法席)과 사람이 죽은 뒤 7일마다 제사를 올리는 칠칠재(七七齋), 즉 사십구재를 설행하는 대표적인 왕실원당이 되었다. 성녕대군 사후 대군의 천도를 위한 법석뿐만 아니라 1420년(세종 2) 7월 10일 태종비 원경왕후가 세상을 뜨자 원경왕후를 위한 천도재가 대자암에서 설행되었다. 칠칠재의 세 번째 제사인 삼재(三齋)와 다섯 번째 제사인 오재(五齋)를 대자암에서 설행했고, 8월에는 보현사(普賢寺)에 있는 전단불(栴檀佛)을 대자암으로 가져오기도 했는데(『세종실록』 2년 8월 19일), 이러한 것들은 원경왕후의 천도를 위한 것이었다. 1421년(세종 3) 9월에도 원경왕후를 위해 대자암에서 법석을 베풀었다(『세종실록』 3년 9월 4일). 특히 이때에는 기화(己和)를 대자암 주지로 삼고, 그로 하여금 성녕대군과 원경왕후 천도를 위한 법회를 개설하도록 하였던 점이 주목되며, 기화는 1424년(세종 6)까지 대자암에 주석하였다.

한편, 태종대 기존 불교 교단을 7종으로 정리한 데 이어, 1424년(세종 6)에는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고 각각 18사씩 36개의 사찰만은 공인했는데, 이때 대자암은 선종 18사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대자암이 원래 가지고 있던 전지에 97결 4복을 더 주어 250결을 만들어 주었고, 절에는 120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것을 공인하였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한편, 1446년(세종 28) 3월 24일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세상을 뜬 뒤 대자암은 소헌왕후를 위한 천도 불사를 설행하는 사찰 중 하나가 되었다. 대군들은 모후(母后)를 위해 불경을 조성하여 대자암으로 경전을 옮겼다(『세종실록』 28년 5월 27일). 그리고 금은으로 사경을 하고 주옥(珠玉)으로 등롱(燈籠)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7일간 대자암에서 불경을 암송하거나 베껴 적는 전경회(轉經會)를 개설하였다(『세종실록』 28년 10월 15일).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한 뒤 세종의 칠칠재 중 초재, 삼재, 오재를 대자암에서 설행하여, 왕실 천도 사찰로서의 기능이 문종대에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대자암 불사를 둘러싼 왕 및 왕실과 신료 간의 논쟁도 문종 즉위 직후 계속되었다. 특히 1450년(문종 즉위) 2월 문종이 당시 2칸 규모이던 대자암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증축하여 3칸으로 만들고 석가와 관음상을 만들어 봉안하려 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고, 여기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세종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하던 금자 『화엄경』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문종실록』 즉위년 2월 19일). 문종은 신료들의 반대에 대해 불상, 불경, 불당 증축은 부왕의 천도를 위해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여 무량수전 증축과 관련된 일련의 불사를 완료하였다. 4월 도승지이사철(李思哲)을 대자암에 보내 상량을 감독하게 했고(『문종실록』 즉위년 4월 25일), 9월 대자암 극락전(極樂殿)이 완공되었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이후 세종의 대상재가 설행될 때까지 대자암 불사를 둘러싼 왕실과 조정 신료 간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1452년(문종 2) 대자암에서 5일에 걸쳐 세종의 대상(大祥) 법회를 설행함으로써 세종 사후 시작된 대자암에서의 세종 천도 법회가 마무리되었다(『문종실록』 2년 2월 21일). 1452년 단종 즉위 뒤 문종의 칠칠재 중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재가 대자암에서 설행되었다. 이후 세조와 성종대 대자암과 관련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세종과 문종대만큼의 위상을 갖지는 못한 것 같으며, 성종대에는 대자암의 전토도 반으로 줄인 것이 확인된다(『성종실록』 15년 8월 3일).

일반적으로 대자암은 임진왜란 때 화를 입어 폐허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조선후기에 문사들이 대자암에 들렀다가 남긴 기록이 전해진다. 고시량(高時良)은 1761년(영조 37) 대자암에서 상을 치렀다고 하고, 최명옥(崔鳴玉)이 어렸을 때 대자암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바위가 무너지면서 암자가 부서져 거주하던 승려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였다. 대자암은 이즈음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과재선생집(果齋先生集)』
  • 『송사선생문집(松沙先生文集)』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최재복, 「조선초기 왕실불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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