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속허통(納粟許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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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을 납부한 서얼들에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자격을 주는 일.

개설

조선시대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의 적자(嫡子)가 아닌 서얼(庶孼)은 신분적 제약을 받았다.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이라고 하여 과거 응시와 관직 임용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조대부터 곡식을 바친 서얼에 대해서는 과거 응시를 허락하는 길이 열렸다. 납속허통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크게 확대 시행되었다. 이후 이 제도는 1696년(숙종 22)에 납속 없이도 서얼들에게 과거 응시를 허용하자는 이조판서최석정(崔錫鼎)의 건의에 따라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일처주의(一妻主義) 가족제도가 정착되면서, 본처 외에는 모두 첩으로 간주되고, 첩의 소생인 서얼에게는 사회적·신분적 차별이 가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서얼들은 과거를 거쳐 관직에 진출하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서얼을 명시적으로 차별하게 된 것은 1415년(태종 15) 서선(徐選)의 건의에 따라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고 하는 규제가 성문화된 뒤부터였다(『태종실록』 15년 6월 25일). 그 후 세조·성종 연간에 『경국대전』이 편찬되고 여기에서 서얼금고법이 법제화되면서 서얼의 과거 응시 금지가 제도화되었다. 결국 양민 첩의 소생인 ‘서(庶)’, 천민 첩의 소생인 ‘얼(孼)’은 문과(文科)·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응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제약에 대해, 이후 서얼 출신들이 단체로 상소를 올려 서얼들에게도 벼슬의 기회를 제공해 달라는 취지의 허통(許通) 운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1583년(선조 16)에 이탕개(尼湯介)의 난을 계기로 병조판서이이(李珥)가 군사력을 확보하고 군량을 모집하기 위하여 군복무를 자원하거나 곡식 또는 말을 내는 서얼에게 허통케 하자는 건의를 하게 되었다(『선조실록』 16년 4월 14일). 이 방안이 수용되면서 처음으로 곡식을 내거나 말을 바쳐 허통을 받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납속허통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면 시행되었고, 전후 궁궐의 영건사업과 진휼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정부는 허통첩(許通帖)을 판매하고 그 가격을 꾸준히 낮추면서까지 문호를 넓혀 나갔다. 이에 따라 1583년(선조 16)에 쌀 80석(石)이던 허통첩의 가격은 1593년(선조 26)에는 15석, 1625년(인조 3)에는 양민 첩의 아들이 10석, 천민 첩의 아들이 12석, 1645년(인조 23)에는 양민 첩의 아들이 7석, 천민 첩의 아들이 9석까지 내려갔다. 그 후 현종과 숙종대에 이르러 대체로 양민 첩의 아들은 4석, 천민 첩의 아들은 6석 정도로 가격이 고정되었다. 이처럼 정부가 납속 값을 인하한 배경에는 곡식의 모집이 시급했던 시대적 상황도 있지만, 보다 많은 서얼의 참여를 유도하고 불법적인 과거 응시를 막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변천

1625년(인조 3)에는 정부에서 양민 첩의 아들은 손(孫), 천민 첩의 아들은 증손(曾孫)대에 이르면 별다른 제약 없이 허통을 허락하였다. 또 청직(淸職)은 아니지만, 요직(要職)에는 나갈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였다(『인조실록』 3년 11월 13일). 이에 따라 납속허통제의 효력은 약화되었고, 곡식을 내고 허통첩을 받고자 하는 서얼은 점차 줄어들었다. 곡식을 내고 허통첩을 받지 않더라도 많은 곡식을 납부한 서얼들은 영직(影職) 내지 실직(實職)을 받고 동반 정직(東班 正職)이나 수령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허통첩의 효용 가치는 계속 하락하였고 서얼들의 허통 운동은 계속되었다. 결국 1696년(숙종 22)에 이조판서 최석정(崔錫鼎)이 서얼들이 납속하지 않더라도 문과·무과와 생원·진사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지면서 납속허통제는 폐지되었다(『숙종실록』 22년 8월 3일). 요컨대 납속허통은 서얼금고법에 묶여 있던 서얼들의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을 열어 주는 전단계적인 기능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최이돈, 「조선 초기 서얼의 차대와 신분」, 『역사학보』 204, 2009.
  • 배재홍, 「조선 후기 서얼 허통과 신분 지위의 변동」,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