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茶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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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승려나 불교 신자의 시신을 화장하는 의식.

개설

다비(茶毗)는 산스크리트어 ‘Thapita’의 음역(音譯)으로, 화장(火葬) 또는 사망을 뜻한다. 육신을 원래 이루어진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도 있다. 인도에서 널리 행해진 장례 의식 가운데 하나로, 시체를 불태워 그 유골을 묻는 행법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도입과 더불어 4~5세기경부터 행해져 왔는데, 지금까지도 불교에서는 승려들의 장례 의식으로 이용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불설정반왕반열반경(佛說淨飯王般涅槃經)』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부왕인 정반왕(淨飯王)이 세상을 떠나자 갖가지 향나무를 쌓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은 뒤 불을 붙였다. 불이 꺼진 뒤에는 유골을 주워 금함(金函)에 담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부처도 부친의 시신을 화장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은 다비를 거행한 뒤 사리를 모아 탑을 쌓는 것은 불씨(佛氏)의 정법(淨法)이라고 하였다.

불교가 탄압을 받은 조선시대에도 승려들이 죽으면 다비식을 거행하여 시신을 처리하였다. 예컨대 태조의 왕사 무학자초(無學自超)의 장례 역시 다비로 치러졌다. 1405년(태종 5)에 자초가 금강산 금강암(金剛庵)에서 입적하자, 평원군(平原君)조박(趙璞)이 그를 위하여 법호를 내리고 비(碑)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이때 사간원에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가 천민 출신이며 죽어서도 이상한 자취가 없음을 지적하였다(『태종실록』 5년 9월 20일). 대개 승려가 죽고 난 뒤 다비를 하면 영험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자초가 죽은 뒤에는 신이한 현상이 없었음을 두고 그의 법력이 뛰어나지 않았다고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태상왕(上王)인 태조의 명임을 밝히고 일을 진행시켰다.

조선초기에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가에서도 불교식으로 화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왕실, 관인들로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유습이 조선초까지 전승된 것이다. 1420년(세종 2)에 세종은 고명하다는 사대부조차 모두 다비에 혹하여 땅에 장사하지 않은 자가 많게 되었다며, 불교식 화장이 성행하고 있음을 개탄하였다(『세종실록』 2년 11월 7일).

화장은 조선초기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들의 풍습이기도 했다. 1439년(세종 21) 북평관(北平館)에서 예조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여진인은 부모가 죽으면 화장을 한다."고 전했다(『세종실록』 21년 1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담헌서(湛軒書)』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정길자, 「한국불승의 전통장법 연구」, 『숭실사학』제4집, 숭실대학교 사학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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