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사(光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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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원찰로, 경기도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鳳鳴山)에 있었던 절.

개설

광암사(光巖寺)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중기부터 소재도량(消災道場)으로 유명하였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자주 찾았고, 이들의 사후 원찰(願刹)로 지정되었다. 고려말의 고승 환암혼수(幻庵混修)가 주석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소재도량이 개설되었는데, 언제인지 모르나 폐사되어 조선중기에는 절터만 남아 있었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179년(고려 명종 9) 절에서 소재도량을 열어 천재(天災)를 예방하고자 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창화사(昌化寺), 운암사(雲巖寺)라고도 하였다. 1360년(고려 공민왕 9) 이후 공민왕은 왕비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절에 자주 행차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무렵 시흥종(始興宗)조계종(曹溪宗) 사이에 소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분규가 있었다. 이에 공민왕은 조계종의 천화사(天和寺)를 시흥종에 소속시키고, 시흥종이었던 이 절을 조계종으로 옮기며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로 이름을 바꿨다.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절의 동쪽에 정릉(正陵)을 조성하고, 이 절을 노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지정하였다. 1368년(고려 공민왕 17)에는 절에서 소재도량을 열어 액막이를 하였다.

1372년 중창을 시작하였으나 미처 완성되기 전인 1374년에 공민왕이 서거하였다. 우왕은 공민왕의 능인 현릉(玄陵)을 조성하고 이 절을 역시 원찰로 지정하였다. 1377년까지 대규모의 중창이 이어져 미륵전·관음전·해장당(海藏堂) 등 10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 되었다. 이듬해인 1378년(고려 우왕 4) 광통보제선사비를 건립하였는데, 그 비문은 이색(李穡)이 지었다. 우왕은 국력을 기울여 완성한 절을 환암혼수에게 맡겼다. 환암은 3년간 주지를 지냈고, 1384년(고려 우왕 10) 다시 왕의 청으로 절에 돌아왔다. 다음 해에는 절에서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을 열어 법회를 책임 주관하는 주맹(主盟)을 맡았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 절은 성변(星變) 등의 재앙을 물리치는 소재도량으로 유명하였다. 1396년(태조 5)과 1397년 연이어 관리를 파견하여 소재 법석을 개최하였다(『태조실록』 5년 11월 10일) (『태조실록』 6년 4월 25일). 이후 절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언제인가 폐사되어 1596년(선조 29)에 이미 빈터만 남아 있었다(『선조실록』 29년 3월 3일).

참고문헌

  • 김창현, 『고려의 불교와 상도 개경』, 신서원, 2011.
  • 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박종진, 「고려시기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 『역사와 현실』38, 역사비평사, 2000.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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