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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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전을 세는 단위의 하나.

개설

관(貫)은 동전을 세는 단위로 동전 1,000문(文)이 1관에 해당한다. 동전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주조하는데, 나뭇가지처럼 생긴 거푸집을 이용하여 동전을 잎사귀처럼 떼어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흔히 엽전(葉錢)이라고도 불렀다. 엽전은 한 닢을 1문 혹은 1푼[分]이라 하였으며, 10푼을 1돈[錢], 10돈을 1냥(兩)이라 하였다. 동전은 기본적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에 따라 둥글고 납작하며 가운데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어 이를 꿰어 사용하였다. 이에 100문의 돈꿰미가 1냥이 되고, 10냥의 더 큰 돈꿰미가 1관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대전회통』 「호전」조의 국폐(國幣) 항목을 살펴보면, 『경국대전』 당시에는 나라 화페인 국폐(國幣)로 포화(布貨)저화(楮貨)를 통용하도록 하다가 『속대전』 시기에 와서는 국폐로 동전(銅錢)을 사용하도록 조항이 바뀌어 있다. 이때 국폐에 해당하는 동전을 상평통보(常平通寶)라 칭하고, 단위는 100문을 1냥으로, 10냥을 1관으로 명시하였다.

조선전기에도 1423년(세종 5)에 조선통보(朝鮮通寶)를 발행하여 유통을 시도하였으나 민간의 거래에는 대부분 쌀과 포목이 활용되었다. 1678년(숙종 4) 상평통보가 발행되어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동전은 국폐로서 기능하게 되었으며 동전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냥을 기준으로 각종 물화의 가치를 환산하는 방식이 통용되었다. 1관은 10냥에 해당하는 가치로 교환되었다.

변천

조선시대 동전의 주조는 재정적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행해져왔으나, 동전의 크기와 질이 조금 달랐을 뿐 주조 방식과 형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였다. 여기에 동전의 단위 역시 푼-돈-냥-관을 동일하게 적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저화를 국폐로 하던 태종대에도 『대명률』 조항에 입각하여 동전 1,000문을 1관으로 한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태종실록』 6년 3월 7일). 고종대에 접어들어 당백전(當百錢), 당오전(當五錢)이 발행되면서 고액화폐에 적용되는 동전의 단위는 상평통보와는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원유한, 『한국의 전통사회-화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 유현재, 「조선 초기 화폐유통의 과정과 그 성격-저화유통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9, 2009.
  • 조영준, 「한국 역사 속의 화폐」, 『정성채박사 기증 화폐특별전』, 국립민속박물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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