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론(峻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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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안에 대한 준엄한 논리 또는 그러한 입장을 보이는 정파.

개설

준론(峻論)이란 특정한 정치 사안이나 문제에 대한 준엄한 논리 또는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던 정파(政派)를 지칭한다. 준론은 기본적으로 붕당의 의리를 중시하던 정치 집단이다. 탕평론이 대두하면서 준론 내에서 입장이 나뉘어 반탕평론적 입장을 보이거나 탕평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다. 반대되는 용어는 완론(緩論)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준론은 조선전기에 고담준론(高談峻論)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다가 선조대 동인과 서인의 붕당 형성 이후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세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590년(선조 23) 정여립 옥사와 관련한 한 기사에서 옥사와 관련된 무리를 지칭해서 준론명사(峻論名士)로 표현하였다(『선조수정실록』 23년 6월 1일). 또한 현종 연간에는 송시열을 유종(儒宗)으로 삼고 청론(淸論)을 자임하는 무리들을 준론이라고 지칭하였다(『현종실록』 5년 윤6월 12일). 준론 계열의 인물은 성격상 삼사(三司)의 관원에 주로 임명되었다(『현종실록』 5년 4월 18일).

변천

경종 연간 신임옥사를 거치며 집권 세력이었던 소론은 노론의 처리 문제와 남인의 등용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나뉘었다. 노론에 대해 강경한 처벌 입장을 취하던 세력들이 급소(急少)로, 노론의 처벌 대상을 주모자로 한정하자는 주장과 함께 급소의 맹주인 김일경(金一鏡)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 완소(緩少)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들 대결 구도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던 세력들이 준소(峻少)라 분류되었다. 준소에는 조태구·최석항·이광좌 등이 포함되었다.

영조대 탕평책이 본격적으로 구현되면서도 준론은 여전히 자파 세력을 지지하거나 붕당의 논리를 우선시하였다. 1733년(영조 9) 이양신 같은 인물은 당시의 탕평주인(蕩平主人) 중 한 명인 송인명을 비난한 바 있는데, 이때 그는 준론으로 분류되었다(『영조실록』 9년 10월 27일).

준론은 또한 탕평의 지지 여부를 둘러싸고 입장을 달리하였다. 즉 반탕평론 입장을 표방하는 세력이 있었고, 준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탕평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한원진으로, 그는 원칙적으로 탕평을 부정했다. 탕평이 충역(忠逆)과 의리(義理)를 혼란시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영조대 전반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으로, 그는 원칙적으로 탕평을 지지하면서 소론 세력을 변별해서 탕평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들 중 탕평을 지지하는 준론의 경우 일부 세력이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노론의 정치 의리가 받아들여지면서 정치에 참여하였다. 영조대 후반에는 청명당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정조 즉위 이후 정권에 참여하여 집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참고문헌

  •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박광용 교수의 시대사 읽기』, 푸른역사, 1998.
  • 박광용,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신편)한국사』32, 국사편찬위원회, 1997.
  •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 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56, 1983.
  • 정만조, 「숙종 후반~영조초의 정국과 밀암 이재(李栽)의 정치론」, 『밀암 이재 연구』,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