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筆巖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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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선조 23) 김인후를 제향하기 위해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한 사원.

개설

1662년(현종 3) 사액을 받은 필암서원은 하서(河西)김인후(金麟厚)를 주향으로 하고 양자징(梁子澂)을 배향으로 하여 정기적인 제례를 거행하고 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전국적인 서원 철폐에도 존속한 47개소의 사우 가운데 하나로서, 당시 존속한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가 사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필암서원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철폐를 면한 유일한 서원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필암서원 관련 기사는 3건이다. 내용을 살피면, 효종대 사액 관련 기사와 정조 연간 필암서원의 추향에 대한 유생들의 상언, 그리고 전국적인 서원 철폐가 단행되던 고종대에 존속한 47개소의 서원에 대한 기사가 그것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세기 사림들의 향촌 활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서원은 선조대 이후 사림의 정치가 본격화함에 따라 발전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전라도 지역에서도 각처에서 서원이 건립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건립되었던 초기 서원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1564년(명종 19) 순천(順天)에 유배 왔다가 사사당한 김굉필(金宏弼)을 모신 옥천서원(玉川書院)이 처음 세워진 것을 필두로 1570년(선조 3)에는 기묘사화로 사사된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죽수서원(竹樹書院)이 능주에 세워지고, 연이어 사액이 내려지는 등 서원 건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필암서원도 이러한 서원 건립 추세를 배경으로 장성 출신 유현이었던 김인후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곳이다.

필암서원은 김인후가 죽은 지 30년 후인 1590년 김인후의 문인인 변성온 등과 장성 사림들의 공조로 기산 아래(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원 건립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일정 부분 작용하고 있었다. 1589년(선조 22) 발발한 기축옥사 이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은 중앙 정국에서 극심한 대립을 노정하고 있었고, 이러한 갈등의 여파는 전라도 지역의 사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축옥사 과정에서 서인 측 입장에 있던 김인후의 문인들은 자신들의 결속을 위하여 필암서원 건립을 추진해 나갔고, 이런 이유로 필암서원은 건립 초기부터 서인계 서원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장성 지역을 중심으로 향촌에서 사림의 중심 기구로 기능했던 필암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1624년(인조 2) 복설되었다. 이후 장성 사림들은 서원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사액 요청을 활발히 하였고, 조정에서는 1659년(효종 10) 윤3월 28일‘필암’이라 사액을 내렸으며[『효종실록』 10년 윤3월 28일]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서인계 서원으로 그 성격을 강화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서원 조직에서 경원장(京院長)을 두었던 데서 보듯 필암서원은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서원 조직은 원장과 부원장에 해당하는 원이(院貳)와 진신장의(搢紳掌議)를 두어 중앙 관료나 지방관을 임명하고, 또 유림장의(儒林掌議)와 유림색장(儒林色掌)을 두어 향촌 사림들이 이를 전담하는 이원적인 원임(院任) 구성을 하였다. 이는 서인계 서원의 전형적인 구성 방식이었다.

이러한 원임 구성은 사림 정치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자파 세력을 향촌에 확산하기 위해 서원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 관료들이 경원장 등을 역임하여 향촌 사림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는데, 이는 정쟁의 과정에서 향촌 서원을 통해 자기 당파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향촌의 사림들도 중앙 권력과의 연계를 통해 서원의 위상과 자신들의 신분적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필암서원은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제향과 강학 및 통문을 통한 정치·사회적 제반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서원의 강회(講會)는 간헐적으로 개최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서원은 양반 유림 사회에 관련되는 문제가 발생했거나 그러한 소식을 접했을 경우 유회(儒會)를 열었다.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김인후의 종향론(從享論)이 필암서원을 중심으로 발의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1769년(영조 45) 중앙의 노론 산림 김원행(金元行) 등과 연결된 필암서원의 원유(院儒)들은 강회를 개최할 때 김인후의 종향론을 발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호남의 사류들은 광주에서 회합하여 종향에 대한 내용을 성균관에 통문하여 협조를 구한 다음 상소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종향 시도는 중앙에서 별다른 지원을 얻지 못해 성사되지 못했지만, 전라도 지역 사림들의 공론을 취합하고 중앙과 연대해 이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필암서원의 정치·사회적 기능의 일단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변천

필암서원은 숙종 연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해 나갔던 경향 속에서 노론계 서원으로 존재하였다. 이 점은 제향 인물인 김인후에 대한 추숭 시도와 문자 찬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김인후에 대한 전기 찬술자를 살피면, 1672년(현종 13) 박세채(朴世采)가 찬한 행장, 1675년(숙종 1)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표, 그리고 1682년(숙종 8)에 완성된 송시열(宋時烈)의 신도비명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필암서원은 18세기 이후 정계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는 노론 세력을 지지하는 전라도의 대표 서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필암서원을 중심으로 한 노론계 인사들의 움직임은 1796년(정조 20)에 김인후의 문묘 종향이 이루어지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김인후를 문묘에 종향하자는 요청은 18세기 이후 노론의 산림계 인사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류가 표면화되었던 시기는 1771년(영조 47) 전라도 유생 양학연 등의 상소에서 비롯되었고, 1786년(정조 10) 2월 서원에 김인후의 문인이자 사위인 양자징의 추배를 요청한 상언(上言)이 국왕의 윤허를 받음으로써 열기를 띠었다(『정조실록』 10년 2월 26일). 이후 거듭 상소가 이어져서 1796년(정조 20)에 관학 유생들의 상소를 계기로 정조는 마침내 문묘 종향을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필암서원은 문묘 종향 유현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암서원은 서원의 남설과 권위 하락 등의 추세에 영향 받아 여러 서원들이 겪었던 것처럼 부족한 재정으로 인해 교육 기구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갔다. 18세기 이후 본격화한 서원의 쇠퇴는 1871년(고종 8) 47개소만 남겨놓은 서원의 대대적인 훼철로 종결되었다. 필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김인후를 모신 서원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철폐는 면하였지만, 경제적 특혜가 줄어들어 운영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김인후의 후손들이 서원의 유지와 운영에 더 큰 영향력을 끼쳐 유림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는데, 이는 필암서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19세기 당시 조선의 서원이 처했던 정치·사회적 위상을 반영하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이었다.

의의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라는 위상에 어울리지 않게 필암서원과 관련하여 현전하는 자료들은 빈약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사액과 추향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만이 수록되어 있고, 서원에서 전해지는 청금록(靑衿錄), 유안(儒案) 등도 전무한 실정이다. 서원 운영의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위해서는 자료의 발굴이 필요한 실정이다.

참고문헌

  • 『필암서원지(筆巖書院誌)』
  • 송정현, 「필암서원 연구」, 『역사학연구』10, 1981.
  • 윤희면, 「전라도 장성 필암서원의 정치사회적 기능」, 『전남사학』17, 2001.
  • 전형택, 「조선 후기 필암서원의 경제기반과 재정」, 『전남사학』11,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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