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도감(練主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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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練祭) 이후에 사용되는 신주인 연주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던 기관.

개설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신주는 우주(虞主)와 연주(練主) 등 두 가지가 있었다. 우주는 장사 후 신주를 혼전으로 모셔 오는 반혼(返魂) 이후부터 연제 때까지 혼전에서 봉안하는 신주로, 뽕나무로 만들었다. 연제는 사람이 죽은 지 1년이 되는 첫 번째 기일에 지내는 제사로, 소상제(小祥祭)라고도 한다. 연주는 연제 이후부터 사용하는 신주로, 밤나무로 만들었다. 연제 하루 전날 연주에 글을 써서 연제를 지냈으며, 이후 상기(喪期)가 끝날 때까지 연주를 혼전에 봉안했다가 상기가 끝난 다음에는 종묘에 봉안하였다. 연주도감은 이와 같은 연주의 제작 및 연주에 글을 써 넣는 서사(書寫) 등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던 임시 기관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편찬된 국가전례서에는 연주도감에 관련된 내용이 없어 그 설립 경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연대기 자료들을 통해서 연주도감이 설치·운영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승정원일기』에는 1757년(영조 33) 10월 기사에 두 혼전의 연주도감을 설치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고, 또 이듬해(1758) 3월 기사에 도총관(都摠管)이익보(李益輔)를 연주도감의 당상(堂上)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이것이 연주도감의 설치가 명시되어 있는 가장 앞 시기의 기록이다. 또 정조대에도 1777년(정조 1)에 연주도감이 설치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순조대 3회, 헌종대 2회, 철종대 2회, 고종대에 6회에 걸쳐 연주도감이 설치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를 볼 때, 연주도감은 18세기 영조대 이후부터 설치·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이전의 연대기에는 연주의 내용을 쓰는 제주관(題主官)에 관한 기사만 있을 뿐 연주도감이 설치되었다는 내용은 없다(『현종실록』 1년 5월 4일).

조직 및 역할

연주도감은 국가전례서에 관련 내용이 없고 이에 관한 의궤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연주도감의 조직이나 기능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를 알기는 어렵고, 단지 연대기 자료의 내용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실록에 수록된 연주도감 관련 기사들은 대부분 연제를 마친 후 연주도감 관원들에게 시상한 내역을 기록한 것들로, 연주도감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한다는 내용을 통해 연주도감에 당상과 낭청 및 기타 원역들이 배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연주도감의 당상·낭청 외에 제주관·제주서사관(題主書寫官)·연주서사관(練主書寫官) 등의 이름으로 연주의 내용을 쓰는 관원이 따로 임명되었던 것도 확인된다(『헌종실록』 1년 11월 14일) (『철종실록』 1년 6월 6일) (『고종실록』 1년 12월 8일) (『고종실록』 35년 1월 4일).

한편, 연주의 제작은 봉상시에서 담당했으며(『현종개수실록』 10년 8월 10일) 이 관행은 고종대까지도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고종실록』 28년 4월 18일). 이를 통해 볼 때 연주도감의 역할은 직접적인 연주 제작보다는 연주 제작 및 내용 서사(書寫: 한자 중복 삭제)와 관련된 여러 행정 업무의 처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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