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봉(城門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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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함경도 경흥(慶興) 지역 봉수로, 서수라보(西水羅堡) 우암(牛巖)에서 시작하는 제1봉수로 직봉 노선에 소속된 봉수.

개설

성문봉은 조선후기에 단천부 증산(甑山)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이성현(利城縣)에 위치한 읍주봉(邑主峰)에 전달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함경도 경흥 서수라 우암에서 시작하는 제1봉수로 직봉 노선에 속하였으며, 함경도남병사(咸鏡道南兵使)의 지휘를 받았다. 영조 때 잠시 혁파 논의가 있었으나, 1895년(고종 32)에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여지도서』의 발간을 전후한 18세기 중엽에 이성현의 진조봉(眞鳥烽)과 더불어 신설되었으며, 단천부 증산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이성현의 읍주봉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지도서』에는 성문치봉(城門峙烽)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북쪽으로는 단천 증산봉과, 남쪽으로는 진조봉과 서로 연결되었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성고개[城峴]의 상부에 위치하였다. 함경 남병사 소관으로, 경흥 서수라 우암에서 시작되는 제1봉수로 직봉 노선에 속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목멱산(木覓山) 제1봉수에 응하였다.

조직 및 역할

성문봉에 소속된 인원과 운용에 관해서는 『여지도서』 이성현 군병(軍兵)의 기록을 통해 개략적이나마 추정할 수 있다. 즉, 당시에는 봉무사(烽武士) 100명이 매월 5일 5명씩 돌아가며 번(番)을 섰다. 봉무사는 봉수군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의 경우 각 지방에서 정배(定配)된 사람을 봉수군 대신 번을 서는 봉무사로 삼자는 박문수(朴文秀)의 주청(奏請)에 따라 1742년(영조 18) 이후부터 봉수군의 역(役)을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는, 1770년(영조 46) 7월에 함경도북병사이방수(李邦綏) 등이 북도의 봉수를 살펴보고 올린 계문(啓聞)에서 잠깐 언급되고 있다. 이때 이방수는 이성현의 성문봉은 단천으로 이속(移屬)하고 무사(武士)와 무기는 입응치(立應峙)의 신설 봉수로 옮기자고 했다. 또한 단천의 사기일언봉대(沙器日彦烽臺)를 혁파하고 무사와 무기는 성문봉으로 옮겨서 봉수의 증설에 따른 폐단을 덜어 줄 것을 청하였다(『영조실록』 46년 7월 9일). 그러나 성문봉은 이러한 혁파 건의에도 불구하고 1895년에 봉수제가 철폐될 때까지 국가의 기간 통신망으로서 운용되었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주홍, 『북한의 봉수』, 서경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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