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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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기거하던 유생들의 자치 기구.

개설

재회는 성균관 학생회 같은 것이었다. 재회는 유생 임원의 장인 장의(掌議)의 주재로 개최되었으며, 재중(齋中)의 모든 공사(公事)를 결정하고 때로는 유생에게 제재를 가하였다. 사안에 따라서는 전체 성균관 유생의 이름으로 왕에게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만약 유소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권당(捲堂), 공재(空齋), 공관(空館) 등의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기구인 재회가 성립한 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1579년(선조 12)에 이신성(李愼誠), 이경여(李敬輿), 임숙영(任叔英) 등이 처음 장의가 되었다. 이때는 아직 장의 등 임원의 선출 방법이 확립되지 않았다. 인조대에 이르러 비로소 회의를 하여 추천하는 규칙을 확립하였다. 재회의 목적은 재중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회의를 통하여 결정하는 데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재회는 장의가 주재하였다. 장의는 상색장(上色掌)·하색장(下色長)과 함께 동·서재에 각각 1명씩 두던 재임(齋任)이었다. 새로 과거에 합격한 자들인 신방(新榜)이 자신들 중에서 재임을 추천하면 하색장이 되고, 그 전방(前榜)의 추천자는 상색장이 되었다. 또 전전방(前前榜)이 장의를 추천할 권리를 행사하였다. 단, 춘추 석전(釋奠) 때에 봉향(奉享)할 사람이나 소두(疏頭)를 선정하면, 이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하색방은 상색이 되며, 상색방은 장의가 되었다. 대개 문벌이 뛰어난 자를 장의로 뽑았다. 색장은 춘추 석전을 기준으로 교체했다.

성균관 식당에서 식사할 때에 여러 유생이 의논을 발의하면, 즉시 재임에게 통고한 다음에 다른 유생에게 통지하였다. 만약 재임이 아닌 사람이 식당을 관리할 때에는 곧 정지하고 동·서재의 반수(班首)에 해당하는 사람이 좌우에 통지하였다. 식당에서 논의하여 의견의 일치를 본 다음에 동재에 모여서 재임에게 편지를 발송하여 물어서 행동하였다.

재회의 소집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장의가 재회를 열면 재사(齋舍)를 맡아 보는 수복(守僕)으로 하여금 성균관 유생들에게 알려 모이도록 하였다. 재회를 싫어하여 피하는 이들이 많아 잘 모이지 않으면, 재직(齋直)들이 홰나무 아래에 서서 서로 손을 잡고 『시경』의 「녹명(鹿鳴」을 읊조렸다. 재직의 소리가 그친 뒤에 그들의 당번 부목(負木)이 각 방을 돌면서 참석하라고 큰 소리로 재촉하였다. 그리고 서재(西齋)의 대청에 자리를 깔았다. 유생들은 북쪽에서부터 나이순으로 서향해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면 수복이 장의를 인도하여 입장하는데 수복이 일어나라고 소리치면 유생들은 모두 일어섰다. 장의는 위쪽에서 마주 서서 동쪽으로 항하여 유생들과 서로 보고 읍한 다음 앉았다.

재회를 할 때 발의자인 색장이 없으면 여러 유생 가운데 공사색장(公事色掌)을 차출하였다. 수복이 그를 인도하여 장의의 다음 자리에 앉혔다. 무릇 공사를 처리할 때, 장의가 발언하면 수복이 반드시 먼저 색장에게 아뢰고, 색장은 소매를 들어 찬성의 뜻을 표하였다. 다음으로 유생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당장(堂長)들에게 아뢰면, 당장 또한 소매를 들었다. 그런 뒤에 유생들에게 포고하였다.

변천

1670년(현종 11) 민진하(閔鎭夏)가 장의가 되어서 처음으로 「재중일기(齋中日記)」를 만들어서 모든 사론(士論) 및 반중(泮中)의 크고 작은 일을 기록하였다. 이것은 수복방(守僕房)에 보관하였고, 재임만 열람할 수 있게 하였다. 재임에 추천된 사람이 하기 싫어 스스로 사퇴하는 것을 자삭(自削)이라고 하는데, 1761년(영조 37)에는 대사성조명정(趙命禎)이 장의를 스스로 사퇴하는 것을 엄금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장의를 자삭하는 자는 ‘영구히 청금안(靑衿案)에서 빼어 버릴 것’을 명하였다(『영조실록』37년 7월 4일). 청금안은 유생 명부였다. 1767년(영조 43)에는 그에 더하여 석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소의 과거 응시도 못하게 하도록 벌칙을 더했다.

참고문헌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 이원호, 「조선조 성균관 유생의 疏集(團體學)에 관한 연구」, 『교육학연구』8권 2호,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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