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연구회(朝鮮硏究會)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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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조선연구회 |
한글표제 | 조선연구회 |
한자표제 | 朝鮮硏究會 |
관련어 | 호소이하지메[細井肇],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통감부(統監府), 한일합병(韓日合倂) |
분야 | 문화/인문학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일제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선연구회(朝鮮硏究會)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종실록부록』 4년 6월 7일 |
1910년 10월 일제의 강제적인 한일병합을 기념하는 취지로 호소이 하지메가 설립한 민간단체.
개설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는 규슈 후쿠오카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1908년 한국으로 와서 경성일한전보통신사, 조선일일신문사 등을 전전하다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어 방출되었으며, 흑룡회 인물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등과 ‘일한합방운동’을 추진하였다.
호소이 하지메는 1910년 조선의 식민지화 사업에 동참할 목적에서 조선연구회(朝鮮硏究會)를 설립하였으나 경영이 어려워지자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에게 넘겼다. 그 후 조선연구회가 정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아오야나기 고타로는 사가 출신으로 호소이 하지메와 같은 규슈 사람이다. 1901년 오사카마이니치 통신원으로 한국에 와서 우편국장, 궁내부의 장서정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이왕직(李王職) 장서각에서 조선사 편찬 작업을 도왔으며 조선의 고전 및 전적들을 조사하였다. 그는 키쿠치 겐조[菊池謙讓], 오무라 유노죠[大村友之丞] 등과 함께 조선연구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키쿠치 겐조는 조선일일신문사를 경영하였다. 오무라 유노죠는 오사카아사히의 신문기자로 경성거류민단 의원과 경성상업회의소 서기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0년에는 『조선귀족열전』을 저술하였다.
한국을 연구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 의해 1910년 10월 조선연구회 창설 취지서가 발표된다. 취지서는 『조선귀족열전』에 실렸다. 취지서에서 조선의 인문을 연구하고 풍속, 제도, 구관(舊慣), 전례(典例)를 조사하여 식민 통치에 도움을 주는 것이 시대적 요구라고 하였다. 또한 고상한 취미와 감흥을 위해 유익한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조선의 서사(書史)를 간행하고, 강연회를 통해 사물의 연구와 사교상의 기관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연구회는 회원제로 운영되었다. 500여 명의 회원은 조선, 일본, 만주, 대만에 분포되어 있었고 관공서, 학교, 지방 단체 등에 소속된 인물들이 많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900년대 초 대한제국에 건너온 일본 지식인들은 한국을 식민지로 전락시킬 방법으로 한국의 고서 원본을 수집, 간행하여 한국 전래의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였다. 간행 서적 중에서 어려운 것은 일본어로 번역까지 하였다. 특히 영국이 식민지 경영을 하면서 조사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한 것처럼 조선의 풍속과 민정을 알아야 하는 것은 식민지 경영의 시대적 요구라고 보았다.
조직 및 역할
1910년 12월부터 매월 국판으로 간행하려고 한 도서는 27책이다. 『동사촬요(東史撮要)』, 『조선풍속고이(朝鮮風俗考異)』, 『고려도경(高麗圖經)』, 『장릉지(莊陵誌)』,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 『어우야담(於于野談)』, 『삼설기(三說記)』, 『난중잡록(亂中雜錄)』, 『화동연표(華東年表)』, 『청구야담(靑邱野談)』, 『계서야담(溪西野談)』, 『역대통고(歷代通考)』, 『각간선생실기(角干先生實記)』, 『존주휘편(尊周彙編)』, 『간양록(看羊錄)』, 『교린지(交隣誌)』, 『열하일기(熱河日記)』, 『동경잡기(東京雜記)』, 『재조번방지(再造藩邦誌)』, 『경도번화지(京都繁華誌)』, 『평양지(平壤誌)』, 『중경지(中京誌)』, 『앙엽기(盎葉記)』, 『사소절(士小節)』, 『격몽요결(擊蒙要訣)』,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이다. 이 가운데 실제 간행된 것은 『장릉지(莊陵誌)』, 『각간선생실기(角干先生實記)』, 『간양록(看羊錄)』, 『열하일기(熱河日記)』, 『동경잡기(東京雜記)』, 『평양지(平壤誌)』, 『중경지(中京誌)』,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9책이다. 『장릉지』, 『평양속지』, 『각간선생실기』, 『간양록』, 『동경잡기』 등의 각 1부(部)는 순종에게 헌상하였다(『순종실록부록』 4년 6월 7일).
변천
초창기에는 사업 부진으로 1년간 간행이 중지되었으나, 1912년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이왕직 차관 고미야 사보마츠[小宮三保松]의 후원으로 간행 사업을 재개하였다.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총독 경영이 잘 이루어지고 내선동화까지 자연히 진행된다고 간주해 조선연구회를 지원했다.
참고문헌
- 『관보(官報)』
- 『조선총독부시정연보(朝鮮總督府施政年譜)』
- 『관습조사보고서(慣習調査報告書)』
- 김태웅, 「1910년대 전반 조선총독부의 취조국·참사관실과 구관제도조사사업」, 『규장각』16, 1994.
- 최혜주, 「일제강점기 고전의 형성에 대한 일고찰-재조일본인과 조선광문회의 고전 간행을 중심으로」, 『한국문화』64, 2013.
- 최혜주, 「한말 일제하 석미욱방(釋尾旭邦)의 내한활동과 조선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45, 2005.
관계망